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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만물상] 유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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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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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국내 제화 업체 창업자가 1000억원대 재산 대부분을 장남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딸 둘이 법원에 소송을 냈다. ‘유류분(遺留分)’ 청구 소송이었다. 유류분은 재산 물려주는 사람이 상속받을 권리를 가진 유족에게 재산을 전혀 물려주지 않을 경우 등에 대비해 법으로 일정 재산은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로마법에서 유래해 1977년 우리 민법에 도입됐다. 남존여비 구습을 피해 여성 상속권 일부라도 보장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법이 보장하니 장남으로선 안 줄 도리가 없었다. 소송은 장남이 일정액을 동생들에게 지급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당시 언론은 ‘딸들의 반란’이라고 했다.

▶몇 년 뒤 혼외자(婚外子)들도 나섰다. 전 재벌 회장, 전직 대통령 아들이란 사실을 법원에서 인정받고는 유류분 청구 소송을 냈다. 우리 법은 상속에서 혼외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도입 당시만 해도 드물었던 유류분 소송이 이젠 재벌가에선 예삿일이 됐다. 지금도 몇몇 기업의 오너 가족 사이에서 소송이 진행 중이다.

▶'상속 전쟁’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번졌다. 2012년 590건이던 유류분 소송은 지난해 2035건이 돼 3배 이상으로 늘었다. 소송 과정에서 가족들이 원수가 되는 경우가 많다. 8년 전,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어느 50대는 어머니가 세상을 뜬 뒤 단독주택을 상속받았지만 형제들에게 유류분 소송을 당했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지 않은 형, 누나가 무슨 권리가 있냐”고 항변했지만 결국 패소했다. 법정 밖에서 멱살잡이까지 하면서 형제들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 어느 변호사는 “‘돈이 피보다 진하다’는 걸 보여주는 소송”이라고 했다.

▶유류분 제도가 궁극적으로 보호하려는 것은 ‘가족 공동체’다. 그런데 가족 해체를 조장하는 역설이 벌어지는 것이다. 불효자에게도 당당히 재산을 요구할 권리를 보장한다고 해서 ‘불효자 상속권’ ‘불효자 양성법’이란 지적도 나왔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 그늘이 큰 듯하다.

▶어제 헌재가 유류분 제도를 규정한 민법 일부 조항에 대해 위헌과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불효자 등은 상속에서 배제하거나 제약해야 한다는 취지다. 부모를 오래 부양하거나 재산 형성에 기여한 자녀는 상속을 더 받게 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사회 상식과 국민 법 감정에 맞는 결정이다. 상속 독식도 안 되지만 가족 간 상속 전쟁과 반목도 안 된다. 이번 결정이 유류분 소송을 줄여 상속 전쟁을 막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최원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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