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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다큐멘토링] 인재를 그 자리에 앉히는 것도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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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석 발행인]

이항복은 조선을 대표하는 천재 중 한명이다. 인물을 잘 알아보는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 그도 인재를 잘못 천거한 예가 있다. 원균이다. 물론 더 큰 문제는 임금인 선조에게 있다. 그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순신의 직職을 빼앗고 원균에게 수군을 맡겼다. 이처럼 지도자에게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능력은 중요하다. 총선 참패 이후 대통령실 참모들이 줄줄이 사표를 냈다. 권력자는 그 자리에 어떤 사람들을 앉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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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근을 멀리하고 인재를 가까이 두는 건 지도자의 덕목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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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도체찰사 이원익과 구례에서 전쟁 가능성을 논의하고, 이원익이 요청한 경상우도의 해안지도를 그려 보내주기도 했다. 그리고 12일간 체류했던 구례를 뒤로하고 다시 백의종군의 길을 떠났다.

구례의 석주관을 지나 악양과 하동을 거쳐 1597년 6월 4일에 합천군 초계의 도원수부(도원수의 진영)가 보이는 곳에 당도했다. "만일 이 험한 곳에 진영을 치고 지킨다면 1만명의 군사라도 지나가지 못할 것이다." 지형을 살펴본 결과 기암절벽이 1000길이요, 깊은 강물이 굽이돌며 길도 험악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도원수부 인근 이어해의 집을 임시 거처로 삼았다. 방을 도배하고 여러 인사들과 문안을 하면서 나흘을 보내고 6월 8일 권율을 만났다. 다음날엔 처음으로 노마료(백의종군하면서 받는 급여)를 받았다. 초계에서의 백의종군 일상은 순천과 구례에서 체류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권율은 물론 도원수 종사관 황여일과 만나 주로 군사 관련 논의를 했다. 황여일은 초계의 산성에 험준한 요새를 쌓지 않은 것을 한탄하기도 했다. 토벌과 방비 대책이 허술한 점도 토로했다. 이순신이 초계에 도착한 첫날에 느낀 점과 크게 다르지 않은 판단이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경상우수사 배설, 하동현감 신진, 순천부사 우치적 등 14명과 서신을 교환하는 한편 승병장 처영 등과 만나 왜적의 동태를 듣고 의견도 나눴다. 돗자리 재료인 왕골을 직접 쪄서 말리는 허드렛일도 하고, 외가의 족보도 만들고,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6월 17일 아침, 권율은 이순신을 보자마자 비변사(당시 군사·정치·외교는 물론 정무를 조율하는 합의기관)에서 내려보낸 공문을 보여줬다. 원균이 조정에 올려 보낸 장계였다.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먼저 안골포의 적을 무찌르고 난 후에 수군이 부산 등지로 진군할 것이니, 안골포의 적을 먼저 칠 수는 없겠습니까."

권율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이번엔 자신의 장계를 이순신에게 내밀었다. "통제사 원균이라는 인물은 전진할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안골포를 먼저 쳐야 한다고 합니다. 수군의 여러 장수들은 이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균은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절대로 여러 장수들과 대책을 합의하지 못할 것입니다. 원균은 일을 망쳐 버릴 것이 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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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자질 논란이 있었던 원균을 총애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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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원균으로 돌려보자. 그는 이순신이 체포되기 직전 수군삼도통제사로 임명됐다. 그러자 가장 먼저 이산해, 윤두수, 이항복 등 세명의 당상관에게 달려가 임명사례를 했다. 이때 이항복은 "응당 노력하여 적을 격파하라"고 당부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당한 수치를 씻게 됐다"며 말을 이었다. "멀면 편전으로 쏘고 가까우면 장전으로 쏠 것이오. 육박전에서는 검을 쓰고 이어 몽둥이를 쓰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지요." 큰소리를 떵떵 친 것이다.

이항복은 혀를 끌끌 찼다. "대장이 된 자가 계책을 운용해 승리를 거두는 방법은 모르고 창검을 먼저 말하니, 이는 일개 군관의 일"이라며 탄식했다. 천재로 소문난 그가, 인물을 잘 알아보기로 유명한 그가 무슨 이유로 원균을 천거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원균은 의기양양하게 미첩을 거느리고 1597년 2월말 한산도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이순신의 최측근을 좌천시켰다. 경상우수사 배홍립은 배설로 교체됐고, 이미 나주목사로 임명됐던 권준은 부임도 하지 못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나머지 장수들은 유임됐지만, 원균은 그들과 소통부재를 드러냈다. 작전회의를 하던 운주당에 울타리를 쌓고 첩과 함께 지내며 장수들을 멀리했다. 군사 조련과 병기 관리 등도 뒷전으로 밀었다.

원균이 한산도에서 애첩들과 풍악을 울리고 있을 때였다. 도원수 권율이 험상궂은 얼굴로 찾아왔다. 가등청정의 후군後軍이 부산으로 건너 나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권율은 적이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를 진주병사 김응서로부터 전달받았다. 그런데 이 정보는 소서행장이 보낸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귀띔해준 것이다. 권율 등 군 수뇌부와 조정 중신들이 이번에도 요시라의 권모술수에 속아 넘어갔다.

요시라의 반간계는 결국 조선군 수뇌부의 전략전술에 큰 혼란을 초래했다. 조정에서는 수군이 건재하다는 점을 알리고 부산으로 오는 보급을 차단하는데 역점을 뒀다. 선조가 "안골포에 있는 적은 경솔히 들어가 쳐서는 아니 된다"란 분부를 내린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이순신이 없는 수군을 과대평가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 원균은 육군이 먼저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을 격파하면. 수군을 이끌고 부산포를 공격하겠다"고 버텼다. "이순신이 전투에 나서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모함했던 원균은 정작 자신이 통제사가 된 후엔 싸우러 나갈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수군에 지식이 없는 권율은 "적이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도록 하려면 수군이 해상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며 수군에게 '빨리빨리' 출동하라고 압박했다. 수군의 통제권을 쥐고 있는 권율은 세 명의 수사(원균·이억기·배설)를 독촉해 바다로 출정토록 하겠다며 6월 19일 사천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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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이 사천으로 출발한 그날, 원균은 병선 90여척을 거느리고 안골포를 공격했다. 적의 함대는 처음부터 대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원균은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에게 병선 20척을 몰고 적을 유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인에 성공해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보성군수 안홍국과 평산만호 김축이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6월 25일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슬픈 마음을 이렇게 기록했다. "놀랍고도 애석하다. 한 놈의 적도 사로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수를 잃었으니, 통분함을 어찌 말하랴."

권율은 육군에서 수군으로 재배치된 1000명의 병력을 증원해주면서 조선 수군의 출정을 독촉했다. 이에 따라 원균은 134척의 함선을 동원, 7월 4일 부산 바다로 출발했다. 칠천도와 옥포를 거쳐 7일 부산포 인근 다대포에 진입한 조선 수군은 적선 10척이 정박해 있는 것을 적을 포착했다. 적들은 배를 남겨놓고 모두 육지로 도망갔다. 아군은 적의 배를 모두 불태워버리고 배안에 있는 군량미 200석도 거둬들였다. 여기에 고무된 원균의 함대는 절영도 바깥바다 쪽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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