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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재단에 기부한 재산, 고인의 형제 자매는 ‘상속 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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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종석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2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민법 제1112조 등 유류분 제도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및 헌법소원 선고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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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류분 제도’는 고인(故人)의 유언과 관계없이 법정 상속인들의 최소 상속분을 법으로 보장하는 것으로, 1977년 도입됐다. 상속 재산이 주로 장남에게 돌아가니 여성과 다른 자녀의 생존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적이었다. 가족 노동으로 형성된 가족 재산을 유류분으로 분배해 유족들의 생활을 보장하자는 것이었다.

이후 한국 사회 구조는 급변해 3인 이하 가구가 보편화되고 독립 생계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 됐다. 그러면서 고인을 장기간 돌보지 않았거나 학대했던 유족들까지 유류분 소송을 제기해 유산을 상속받는 경우들이 생겨났다. 25일 헌재는 그런 상황들을 뒷받침하는 민법 조항에 대해 위헌 또는 헌법 불합치 결정을 하면서 제동을 걸었다.

◇패륜 자식과 부모는 상속 배제

2018년 107세 나이로 제주도에서 세상을 떠난 A씨는 마지막 35년 동안 자신을 돌봐준 ‘효자 아들’에게 1000평 땅을 남겼다. 아들은 A씨가 72세 무렵부터 제주에 함께 살며 어머니 A씨를 부양했다. 아들은 A씨 치료를 위해 1억2000만원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A씨가 사망하자 평소 연락도 없던 다른 아들딸 3명이 “땅을 나눠 달라”며 ‘효자 아들’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들은 제주를 떠나 살면서 어머니와 30년 넘게 연락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이 소송을 낸 근거는 ‘유류분 제도’였다. 어머니를 전혀 돌보지 않았다는 이 3명은 법적 상속분의 절반씩을 요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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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후 이종석(가운데) 헌법재판소장과 이은애(왼쪽) 헌법재판관, 이영진(오른쪽) 헌법재판관이 상속 유류분 제도에 대한 위헌 법률 심판 및 헌법 소원 선고를 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헌재 대심판정에 앉은 모습. 이날 헌재는 고인의 형제자매가 고인 뜻과 관계없이 상속 재산 일정 부분을 받게 돼 있는 유류분 제도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장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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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 가수 구하라씨가 사망하자, 20년간 연을 끊고 지낸 친모가 상속권을 주장했다. 친모는 구씨가 9세 때 이혼한 뒤 구씨를 전혀 보살피지 않았다. 그러나 구씨의 경우 배우자와 자녀가 없는 상태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부모가 1순위 상속인이 됐다. 구씨의 친모는 딸이 남긴 유산의 40%를 챙겼다.

헌재는 이런 일이 가능하게 만든 민법 1112조 1~3호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피상속인(고인)을 장기간 유기하거나 정신적·신체적으로 학대하는 등의 패륜적인 행위를 일삼는 상속인(가족)의 유류분을 인정하는 것은 일반 국민 법 감정과 상식에 반한다”면서 “유류분 상실 사유를 별도로 규정하지 않은 현 민법 조항은 불합리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헌재는 국회에 내년 12월 말까지 해당 조항을 개정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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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상훈


◇고인 형제자매도 상속 배제

이모씨는 부동산 등 전 재산을 5개 공익 재단에 기부하고 2020년 3월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생전 미혼으로 배우자도 자녀도 없었다. 그런데 이씨 사망 이후 이씨의 형제자매가 “이씨가 남긴 재산 중 일부는 형제자매들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5개 재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씨의 형제자매들이 이씨의 재산 형성에 기여한 것은 없었다. 이씨가 어머니를 부양하는 것을 돕지도 않았다. 이들이 이씨가 공익 재단에 기부한 재산 중 일부를 요구할 수 있는 것도 민법 1112조 4호 때문이었다. 해당 조항에는 다른 상속자들이 없을 때 고인 형제자매들의 유류분에 대한 청구권을 인정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헌재는 이날 이 부분에 대해서도 전원일치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려 효력을 상실시켰다. 헌재는 “고인의 형제자매는 상속 재산 형성에 대한 기여, 상속에 대한 기대 등이 거의 인정되지 않는데도 유류분을 주는 것은 타당한 이유가 없다”고 했다.

◇효자는 더 받는다

헌재는 고인을 생전에 잘 모시거나 고인의 재산 형성에 기여한 ‘효자’들이 그 보답으로 증여받은 재산에 대해서는 그 권리를 인정해줘야 한다는 취지의 판단도 내놨다. 현재는 ‘유류분 청구권’이 있는 다른 유족들이 반환 소송을 제기하면 이미 증여받은 재산을 내놓아야 하고 법원은 이를 합산한 상태에서 유류분을 분배한다.

이런 내용은 민법 1118조에 규정돼 있는데 헌재는 이번에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고인을 오랜 기간 부양하거나 상속 재산 형성에 기여한 상속인이 그 보답으로 재산의 일부를 증여받는다해도 현행법상 증여 재산이 유류분 산정 기초 재산에 산입돼 재산을 반환해야 하는 불합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한 법조인은 “유산 상속에 있어 효자들을 더 배려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이슬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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