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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이쪽에선 '반유대', 저쪽에선 '표현자유 억압'…퇴진 압박 컬럼비아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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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유대-친팔’ 사이 진퇴양난, 美 컬럼비아대 총장 퇴진 위기

공화당은 “반유대주의 방치” 학내선 “경찰 동원 시위해산”

미국 컬럼비아 대학 총장이 궁지에 몰렸다. 정부의 친이스라엘 정책에 반대하며 학내에서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을 총장이 경찰을 동원해 해산하려 한 것을 두고 비판 여론이 거세기 때문이다. 앞서 컬럼비아대에서 친이스라엘 반대 농성이 벌어지는 걸 두고 공화당 의원들은 총장이 ‘반유대주의 움직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질타했다. 총장으로선 진퇴양난의 상황인 것이다.

미국 대학가를 휩쓰는 친(親)팔레스타인 시위의 진앙이 된 컬럼비아 대학의 네마트 샤피크 총장이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졌다. 친이스라엘 정책을 지지해 온 공화당 등 우파진영이 해임을 요구하고 나섰는데, 이번엔 학교 구성원들로부터도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지 못했다며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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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현지시간) 미 컬럼비아대 정문 밖 팔레스타인 지지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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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7월 컬럼비아대 사상 첫 여성 총장이 되기 전부터 그를 잘 알아 왔다는 한 학자는 25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샤피크 총장이) 어떻게 이것을 헤쳐 나가고 살아남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건 캐치-22(Catch-22·진퇴양난을 뜻하는 관용어구)”라며 “캠퍼스 문화를 공격하는 우익을 달래려 할수록 대학 내에서의 입지가 약화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컬럼비아대는 미국 내 중동 연구를 선도하는 대학 중 하나로 유대계와 아랍계 재학생이 많은 편이다. 이 대학에선 지난 18일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텐트 농성이 진행됐다. 전날 미 하원에서 “반유대주의는 우리 학교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라고 공언했던 샤피크 총장은 시위대가 철수 요청을 거부하자 경찰을 동원해 해산을 시도했고, 결국 학생 108명이 현장에서 연행됐다.

베트남 전쟁이 극단으로 치닫던 1960년대 이후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대학에 공권력이 투입된 이 사건은 거센 역풍을 불렀고, 미국 대학가에서 이스라엘 규탄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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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마트 샤피크 미 컬럼비아대 총장.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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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피크 총장은 전방위적 압박에 처했다. 24일 컬럼비아대를 찾은 마이크 존슨 미 하원의장과 공화당 의원들은 샤피크 총장이 학내의 반유대주의 움직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면서 해임을 촉구했다. 동시에 샤피크 총장은 학생들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학내에서도 비난을 받고 있다.

교수와 교직원, 학생 111명으로 구성된 컬럼비아 대학평의회(University Senate)가 미국대학교수협회(AAUP) 컬럼비아대 지부가 작성한 규탄 결의안을 며칠 내에 표결에 부치기로 했다. 샤피크 총장이 “학문의 자유와 공유 거버넌스란 기본 요건을 침해하고 학생의 권리를 전례 없이 공격했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AAUP 컬럼비아대 지부의 총무를 맡은 마르셀 아게로스 교수는 학내 문제에 경찰을 동원한 샤피크 총장의 결정을 비판하면서 “물론 우리는 반유대주의적 행동을 규탄한다”면서도 “하지만 대학 지도자는 (대학이) 추구하는 바를 지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컬럼비아 대학평의회는 자칫 압박을 이기지 못한 샤피크 총장이 사임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결의안 초안을 재작성하면서 수위를 조절 중이라고 일간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지난해 10월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공격으로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시작된 이후 학내 반유대주의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치권의 압박에 시달리던 하버드대와 펜실베이니아 대학 총장이 사임했는데, 이와 같은 상황이 재연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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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컬럼비아대 캠퍼스 농성 텐트촌.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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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피크 총장이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공화당의 해임 요구에 대학이 굴복하는 모양새가 된다는 것도 고민거리다. 총장 선임권을 지닌 컬럼비아대 이사들도 24일 샤피크 총장을 ‘강력히’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같은 날 샤피크 총장은 “시위할 권리는 컬럼비아대에서 매우 중요하고 보호받는 것이지만, 괴롭힘과 차별은 우리의 가치와 어긋나며 상호 존중과 친절의 공동체가 되겠다는 우리의 약속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노슈’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샤피크 총장은 이집트 태생의 경제학자다.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이주한 무슬림으로 영국, 미국, 이집트 국적을 가졌다. 애머스트 매사추세츠대(UMass)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런던정경대(LSE)에서 경제학 석사, 옥스퍼드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계은행(WB)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36세에 최연소 부총재에 올랐고 이후 영국 국제개발부 사무차관, 국제통화기금(IMF) 부총재,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BOE) 부총재 등을 거쳤다. 2017년 런던정경대 첫 여성 총장으로 학계에 돌아왔고 지난해 컬럼비아대 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NYT는 샤피크 총장이 영국 시절 뚜렷한 정치적 성향을 보이지 않았으며 보수당과 노동당 정부 모두와 일했다고 전했다. 2021년 FT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실용주의자이자 정치적으로 비동맹주의적인 인물로 묘사됐다. 당시 그는 미국에서 자란 이집트 소녀로서의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학교에서 ‘흑인인지 백인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갈색”이라고 대답했다고 돌아봤다. FT는 이를 두고 샤피크가 둘 중 어느 한쪽을 택하기를 거부한 것이라면서 “그는 이념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고 평했다.

윤준호 기자 sherp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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