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7 (화)

[백영옥의 말과 글] [351] 성장통과 트라우마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어린이 축구 교실에 갔다가 다친 아이를 보고 놀란 엄마가 코치를 추궁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멀리 있던 나도 들을 수 있었는데, 핏대 높이는 엄마 앞에서 정작 아이는 남 일 보듯 무기력해 보였다. 이 얘길 심리 상담사인 친구에게 말했더니 요즘 열 살 전후의 아이들도 무기력증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그녀에게서 맞은 쪽 아이 편만 들어줘 자신의 아이에게 트라우마가 생기면 책임지라며 괴롭히는 학부모 때문에 고민인 교사 내담자 얘기도 들었다. 때린 아이에게도 사정이 있는데 마음을 읽어주지 않아 자신의 아이도 상처받았다는 것이다. 남들은 적반하장이라 읽고 본인은 정당방위라 쓰는 경우다.

알베르 카뮈는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배웠다”고 말했다. 축구를 잘하기 위해선 몸싸움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상대 선수의 태클과 반칙도 극복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아이는 갈등을 겪으며 삶에서 중요한 자산이 될 인내, 타협, 설득의 기술을 배운다. 싸운 친구와 갈등을 봉합하며 다툼이 실패가 아닌 성장의 과정이라는 사실도 깨닫는다. 하지만 언제부터 우리는 자라면서 겪는 성장통마저 트라우마로 읽기 시작했다. 이제 아이 싸움에 부모의 개입은 디폴트 값이 됐다. 그러나 부모의 의도와 별개로 지나친 개입은 건강한 성장통을 치료의 영역인 트라우마로 만든다. 아이에게 생길까 봐 두려워하던 그 일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과자에 비해 질소만 가득 채운 부실한 내용물 때문에 ‘질소 과자’가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엄마의 항의가 빵빵한 질소처럼 들어찬 축구장에 아이는 바스라지기 쉬운 감자칩처럼 서 있었다. 햇빛 아래에 서도 그림자조차 생기지 않고, 자동문 앞에 서 있어도 문이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존재감 제로의 아이처럼 말이다. 표정 없는 그 얼굴이 떠오르는 건 질소가 사라진 후, 현실 어른이 된 아이의 세계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건강한 성장통을 트라우마로 오독할 때, 우리는 끝내 어른으로 성장할 수 없다.

[백영옥 소설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