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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공산당식 예술의 정치화… 그림밖에 모르던 이중섭은 질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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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응향’ 필화 사건 유탄 맞은 화가 이중섭의 곤궁한 말년

조선일보

일러스트=한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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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하면 떠오르는 ‘은지화(銀紙畵)’는 6‧25전쟁 이후 그의 피란 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궁핍했는지 알려준다. 도화지를 살 돈이 없었던 피란 시절 이중섭은 담뱃갑 속 알루미늄 소재 은색 포장지를 송곳이나 못으로 긁어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그림으로 달랬다. 이렇듯 ‘국민 화가’라는 수식어만큼이나 ‘가난한 화가’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이중섭이지만, 사실 그는 평안도에서 내로라하는 ‘부잣집 막내아들’이었다.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 부농(富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가는 건평만 100평이 넘는 100칸짜리 기와집이었고, 700석에 이르는 토지와 과수원까지 있었다. 세 살 때 부친을 여읜 후로는 평양농공은행 두취(頭取·대표이사)를 역임한, 평양에서 손꼽히는 부호였던 외조부의 슬하에서 자랐다. 1932년 이중섭의 형 이중석은 고향 평원의 토지를 정리하고 솔가(率家)해서 원산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백두상회라는 백화점을 설립하고, 30만평에 달하는 대농장을 경영했다.

1938년 도쿄 문화학원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이중섭은 후배 여학생 야마모토 마사코와 연인이 되었다. 이중섭이 일생의 친구 구상과 만나서 교류한 것도 이 시기 도쿄에서였다. 본가가 똑같이 원산이었던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구상은 이중섭의 첫인상이 “루오의 예수 얼굴을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중섭 역시 “구형은 예수를 닮았어! 루오의 예수 얼굴을”이라고 말해 서로 “말도 안 된다”고 사양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문화학원을 졸업하고 도쿄에 거주하면서 원산, 서울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던 이중섭은 1943년 귀국해 원산에 머물렀다. 1945년 4월, 야마모토 마사코는 막바지에 다다른 전쟁 탓에 관부연락선이 끊기기 직전 현해탄을 건너 이중섭을 찾아왔다. 미쓰이 재벌 계열사 사장이었고, 상당한 재력가였던 마사코의 아버지는 전쟁통에 사랑을 찾아 원산으로 떠나는 딸에게 “너무 힘들면 언제라도 돌아오렴”이라는 한마디를 건넸다. 한 달 후 전통 혼례를 치른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가끔씩 폭격 소리가 들리는 어수선한 시기였지만, 어머니가 마련해준 신혼집에서 이중섭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평화롭게’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석 달 후 마사코의 나라가 패전하고, 소련의 ‘붉은 군대’가 원산을 점령했다. 진위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공산당으로부터 거리에 내걸 스탈린 초상화 제작을 요청받은 이중섭은 스탈린의 상징인 콧수염을 그리지 않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저항했다고 한다.

1946년은 이중섭에게 격랑의 시기였다. 그해 3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을 전격 실시했다. 가구당 5정보 이상 소유지는 몰수해 무상으로 농민에게 나눠주는 조치였다. 그러나 분배라고는 하지만, 매매·소작·저당이 불가능했고, 경작권만 인정하는 허울뿐인 분배였다. 1정보는 대략 3000평에 해당한다. 이중섭의 형 이중석은 소유하고 있던 30만평 토지 중 5정보 1만5000평을 제외하고 95%를 몰수당했다.

이중섭은 더 이상 아무런 걱정 없이 그림만 그려도 되는 ‘부잣집 막내아들’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조직 생활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그였지만, 그해 이중섭은 원산미술동맹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원산여자사범학교 미술 교사로 취직했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도저히 궁리가 안 나서” 2주 만에 사직했지만, 피란 시절 막노동을 제외하면 그 2주가 이중섭의 유일한 직장 생활이었다.

해방 1주년을 기념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원산지부’는 ‘응향(凝香)’이라는 시집을 간행했다. 위원장 박경수는 원산에서 몇 명 안 되는 기성 시인이었던 구상에게 작품을 요청했다. 원산여자사범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구상은 아무리 공산당 치하라지만 해방을 기념하는 시집에 참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응향’에 작품 5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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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이 그린 '시인 구상의 가족' . /케이옥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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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는 하늘에/ 까마귀 날아// 밤과 새벽이 갈릴 무렵이면/ 카스바마냥 수상한 이 거리는/ 기인 그림자 배회하는 무서운/ 골목…”(구상, ‘여명도’) 마냥 기쁘고 행복할 줄만 알았던 해방의 정서를 불안하고 불길한 기운으로 묘사한 지극히 평범한 서정시였다. 박경수의 요청으로 이중섭도 ‘응향’의 표지화로 ‘유희하는 군동상(群童像)’을 그려주었다. 시를 발표한 동인뿐만 아니라 공산당원을 포함한 원산의 예술인 모두가 시집의 출간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한 달 후 평양의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상임위원회’는 ‘응향’에 수록된 시의 태반이 “조선 현실에 대한 회의적, 공상적, 퇴폐적, 현실 도피적, 절망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고 비판하는 ‘시집 응향에 대한 결정서’를 발표했다. 공저자 중 공산당원이 아닌 유일한 인물이었던 구상이 가장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평양의 상임위원회는 ‘응향’의 발매를 금지하는 한편, 진상조사와 관련자 처벌을 위해 원산으로 최명익, 김사량, 송영 등 검열원을 파견했다.

검열원에게 모멸적인 비난을 듣고, 자아비판을 강요받은 구상은 원산을 탈출해 서울로 월남했다. 김동리·조연현 등 서울의 우익 문인들은 ‘응향 사건’을 들어 공산당이 자행한 표현의 자유 억압 사례라고 비판을 이어갔다. 무명의 지방 시인이었던 구상은 “북한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남한으로 망명한 자유 투사”로 일약 남한 문단의 중요 인사로 떠올랐다.

‘응향’의 삽화를 그린 이중섭도 당국에 소환돼 몇 차례 심문을 받았지만, 별다른 처벌이나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다. 그 후로도 이중섭은 공산 치하일망정 형과 모친의 보호로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 없이 지냈다. 그러나 절친이었던 구상의 월남에 큰 충격을 받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는 현실에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이중섭은 절망에 빠져 매일 술을 마셨다. 1950년 10월 원산이 연합군에 수복되고, 곧이어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戰勢)가 역전되자, 이중섭은 아내, 두 아들과 함께 해군 수송함(LST)에 자리를 얻어 월남했다.

부산, 제주, 통영, 대구, 서울로 이어지는 피란 생활 동안 이중섭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가혹한 가난을 맛보았다. 경제적으로는 한없이 무능했던 이중섭은 그림 그릴 화구를 마련하기는커녕 아내와 두 아들을 건사할 능력조차 없었다. 아내는 최후의 수단으로 두 아들과 함께 일본인 수용소로 들어가 일본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중섭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골판지와 담뱃갑 속 은색 포장지에 그리다 마흔 살 나이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홀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가족과 다시 만나 프랑스 파리에서 함께 살고자 했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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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중섭(1916.9.16~1956.9.6) /혜화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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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오누키 도모코, ‘이중섭, 그 사람’, 혜화1117, 2023

오태호, ‘응향 결정서를 둘러싼 해방기 문단의 인식론적 차이 연구’, 어문논집 제48권, 2011

이중섭,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다빈치, 2011

최열, ‘이중섭 평전’, 돌베개, 2014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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