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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그 영화 어때] 나를 괴롭히는 내가 누군지 아십니까, 홍상수 신작 ‘여행자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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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61번째 레터24일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신작 ‘여행자의 필요’입니다. (이번주 영화가에선 특히나 홍 감독님의 작품이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지네요.) 지난 2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인 심사위원대상을 받았죠. 홍 감독님이 해마다 베를린에서 상을 받다 보니 이제는 상을 받아도 그런가부다, 원래 받나부다, 다들 심드렁할 지경이 돼버렸습니다. ^^;;; 사실 어지간한 감독은 평생 한 번 받기도 어려운 건데, 참참. 이번에 상 받은 영화에선 어떤 얘길했는지 짧고 굵게 말씀드려볼게요. (이하 레터에 나오는 대사는 제가 영화관 어둠 속에서 노트에 받아적은 것이라 몇 글자 틀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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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이자벨 위페르)와 그녀의 아리송한 동거인. 시를 쓰는 그는 그녀에게 무엇일까, 누구일까. 그녀는 어떻게 저기에 앉아있게 된 걸까. 수수께끼는 풀 수 없을 때 매력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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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우리의 하루'가 개봉했을 때 레터 보내드렸던 거 기억하세요? ‘그 영화 어때' 레터로는 이례적으로 두 번에 나눠 중얼중얼 보냈는데 평소 제 방식과 달리 미괄식으로 썼던 기억이 납니다. ‘홍상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매편 챙겨보다가 어느샌가 평론가들의 무조건적인 상찬이 오히려 장막이 돼서 안 보게 되더라, 영화 담당이 되어 다시 보니 나를 끌어당기던 홍상수도, 나를 밀쳐내던 홍상수도 모두 여전히 거기에 있더라, 전에 없던 심쿵 한 방까지 있더라'. 이런 얘기를 두서없이 보냈었지요.

저는 홍상수 예찬자는 아닙니다만, 작년 저의 ‘2023 올해의 영화'에는 ‘우리의 하루'가 들어있습니다. 그 대사, “너가 알아줬으면 됐지, 그걸로 됐어.” 그 말이 내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더군요. (제 기억에선 저 말이었는데, 기록을 확인해보니 “자긴 읽었잖아. 그럼 된 거지. 누군가 읽으면 된 거지. 좋으니까 읽었을 거 아냐.” 이게 정확한 대사네요. 홍상수의 분신(分身)인 시인이 방문객에게 한 말입니다) 홍 감독의 영화는 늘 그래왔습니다. 보는 내내 ‘저 자는 왜 저러나, 뜬금없는 저 말은 뭔 뜻인가'를 생각하게 하는데, 다 보고 나면 이상하게 뭔가 남거든요. 맴돌면서 놓아주질 않습니다.

이번 ‘여행자의 필요'가 홍상수의 31번째 장편이다보니, 대부분의 평론에선 그의 기존 작품과 유사성 혹은 차이점을 분석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이런 글은 학술적으론 중요한데, 주말 영화관 나들이를 생각하는 분들께는 안 그래도 재미없는(?) 영화가 더 머리 아프게 느껴질 수 있지 않나 싶어요. 거기에 나열되는 전작을 보지 않고선 이해가 쉽지 않다 보니 홍상수 영화가 갈수록 감상이 아니라 탐구의 대상으로만 굳어져 버린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럼 홍상수의 작품은 전작들을 안 보면 이해가 불가한 작품이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마블 시리즈 아닙니다, 아니고요. ‘여행자의 필요'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홍 감독와 몇 번째 같이 일을 했고 어쩌고 그런 거 하나도 모르셔도 상관없고요. 심지어 홍상수가 감독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보셔도(아, 이건 좀 그런가?) 마음에 꽂히는 한 마디, 한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딱 홍상수라서 던질 수 있는 질문, 홍상수라서 할 수 있는 말들, 장면들. 관객 각자가 취향껏 찾아내는 보물찾기 지도같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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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를 불던 이자벨 위페르를 스쳐지나가던 남자. 만약 그가 돌아보지 않았다면 둘의 이야기는 어떻게 됐을까요. 저에겐 이 장면이 이 영화의 '심쿵' 포인트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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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자의 필요'의 보물은 무엇이냐, 첫째로 드러나는 조약돌은 언어입니다. 여행자가 타국에서 부딪히는 제일 큰 장벽이죠. 언어를 안다는 것과, 사람을 안다는 것. 이 둘은 무척 다른 것 같지만 공통점도 있습니다. 얼마나 마음을 열고 진실하게, 힘들고 길고 고되더라도 마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는가가 중요하니까요.

영화의 주인공은 이리스(이자벨 위페르), 프랑스어를 개인 강습으로 가르칩니다. 그녀는 왜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한국에서 살고 있는데, 첫 장면에 그녀와 한 여성이 프랑스어 수업을 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리스의 불어 교습은 특이합니다. 사과는 애플, 소년은 보이, 이렇게 단어를 가르쳐주는게 아니라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고 그 문답을 정리한 문장을 불어로 써줍니다. 써준 문장을 반복 암송하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게 최종 학습 도달법이고요.

예를 들어, 첫번째 학생이 피아노를 치는데요, 다 치고난 학생에게 이리스가 묻습니다. “어땠어?” 학생의 답은 “행복했어.” “그거 말고?” “멜로디가 아름다웠어.” “아니, 더 깊은 곳에서 뭘 느꼈어?” “나아지고 있다고.” “자랑스러웠어?” “조금. 근데 사실은 좀 짜증났어.” 이 문답 후에 이리스가 씁니다. “내 안의 이 자는 누구인가, 자신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길 원해서 너무나 피곤한 이 사람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면서 살고 있죠. 더 나은 나, 혹은 내가 아닌 내가 되고 싶어서. 이리스는 그 문장을 적어주고 암송하라고 가르칩니다. 그게 이리스식 언어학습법, 마음을 열고 다른 언어를 받아들이는 방법입니다.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무작정 외우는 거죠. 그래야 언어가 마음 속으로 들어가니까.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 나아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방법이기도 하지 않나요.

이 학습법은 두번째 학생으로 나오는 배우 이혜영하고도 동일하게 반복되는데요, 재미있는 것은, 이혜영과 주고받은 문답이 첫번째 학생과 동일하다는 점입니다. 이혜영이 연주하는 악기가 기타라는 점만 다릅니다. 무엇인지 누구인지를 인지하는 본질에 있어서는 누구나 동일하죠. A씨든 B씨든. 어떤 작가는 주인공의 이름을 굳이 붙이지 않는 것으로 그 동일성과 보편성을 드러내려 하고, 홍상수는 같은 작품에서 다른 인물이 나오더라도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게 해서 동일성과 보편성을 두드러지게 합니다. 주인공 이름을 끝끝내 붙이지 않음으로써 보편성을 강조하는 최근 작품은 박찬욱의 HBO 시리즈 ‘동조자’가 있네요.

또 같은 것은, 첫번째 학생과 두번째 학생 모두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 짓는 장면입니다. 첫번째 학생은 빌라 인근에 세워둔 마을 비석을 보다가, 두번째 학생은 마을의 윤동주 시비(詩碑)를 보다가 아버지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립니다. 눈물 짓는 두 사람에게 이리스가 암송용으로 적어주는 문장은,

“매일 나는 지나친다, 진짜 아버지를. 쳐다봐야 할 진짜 아버지가 있기나 한 것일까.”(학생 1)

“우린 어떤 시도 남기지 못한다. 서로 불쌍하다고 느끼고 살 뿐이다. 언제까지나. 우리가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 2)

이리스가 학생들에게 “이걸 반복해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언어를 알게 된다”며 적어주는 문장들은 기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게 되면서 어느샌가 마음에 자리잡게 되는 질문과 해답이기도 합니다. 이후 이리스가 동거하는 남자가 등장하는 후반부는 ‘사람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더 강하게 던집니다. 그 남자는 시인인데, 두달 전 우연히 만나 같이 살게 됐대요. 이리스가 벤치에서 피리를 부는데 너무 못 불더래요. 너무 못 부는데 너무 열심히 불어서 쳐다보게 됐다고 남자가 설명합니다. 누구한테? 갑자기 찾아온 남자의 모친에게요.

남자의 모친은 아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국 여성과 동거하는 걸 알고는 대경실색해 다그칩니다. “너 그 여자 모르잖아. 알지도 못하면서”라고요. 그러자 남자가 말해요. ”그 사람은요, 속세에서 살면서 도를 닦는 사람이에요. 죽는다는 걸 잊지 않고 매일 사는 사람이에요. 나이 많다고 다 진지해지는 게 아니에요. 미쳐가지고 열심히 사는 거랑 진지한 거는 다른 거에요. 가짜에 미치지 않고, 사실에 근거해서 사는 거에요. 그 사람은 노력해요, 쉬지 않고.”

네, 홍상수 감독은 ‘열심히’를 무척 중요한 가치로 보는 것 같습니다. 결과보다 중요한 그 마음. 그리고 ‘진지함’도요. 그가 관객이 들든 안 들든 31편이나 내놓은 힘 아닐까요. 열심히, 진지하게.

이리스는 시를 쓰는 그 남자에게 말합니다. “자기 시 다 좋아, 자긴 좋은 시인이야. 위대한 시인이 될 거야.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시를 포기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아마 어떤 사람이 홍상수 감독에게 해줬던 말이 아닐까요. 홍상수 감독이 누군가로부터 듣고 싶은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우리 모두가 바라는 말일지도.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들려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먼저 해버리는 거죠. 우리에게 소중한 누군가에게요. “다 좋아, 될 거야, 포기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세계적 영화제에서 상 받는 감독도 평범한 회사원도 똑같습니다. 누군가의 응원이 필요합니다. 그런 응원이 본인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가치, 예를 들어 노력과 진지함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온다면 저절로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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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필요'에서 주인공 이리스(이자벨 위페르)는 독특한 방법으로 언어를 가르쳐요. 진실한 감정으로 몇 번이고 암송하는 것. 힘들고 길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사람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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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저에게 홍상수의 영화는 뭐하는 영화냐고 묻는다면 “홍상수가 홍상수를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영화”라고 답하겠습니다. 최근작일수록 더 그래요. 그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 과정에서 얻은 질문과 해답을 대중과 공유하려 하고(감사합니다!), 자신이 풀다풀다 풀지 못한 질문을 영화로 만들어서 세상에 투척합니다. 그 질문을 건네받은 관객은 각자의 해답을 찾아내려 머리를 써야하는데 그 과정의 고통을 즐기는 맛(변태?)은 홍상수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죠.

끝으로, 영화에 나왔던 리스트의 ‘사랑의 꿈' 3번 A플랫장조의 영상 아래에 붙입니다. 임윤찬군 버전입니다. 이자벨 위페르가 첫번째 가르쳤던 학생이 치던 곡이에요. 홍상수 감독이 음악에 대해 아주 그렇게 엄청 예민한 분 같지는 않지만(제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막귀’라고 했던 레터를 기억하실 독자분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ㅎㅎ), 이 곡은 영화 전체 분위기와 의외로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네, ‘사랑의 꿈'을 듣는 마음으로 보시면 편하게(?) 보실 수 있는 영화가 ‘여행자의 필요'랍니다. 꿈처럼, 꽃처럼, 가는 4월과 함께 감상해보시길.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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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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