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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문홍규의 달에서 화성까지] 연구개발 잔뼈 굵은 전문가 포진한 우주항공청 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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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문홍규 한국천문연구원 우주탐사그룹장


전문가는 한 분야에 정통해 깊은 지식과 경험과 통찰을 두루 갖춘 사람을 말한다. 할리우드 영화에는 미래를 예측하거나, 위기에서 세상을 구하는 전문가가 등장한다. 지질학자인 에이미 반즈는 ‘볼케이노’(1997)에서 LA 인명사고가 화산 활동 때문이라고 밝혔고, 기후학자 잭 홀은 ‘투모로우’(2004)에서 빙하기가 닥칠 거라 예고했다. 하지만 전문가의 말이 항상 먹히는 것은 아니다. ‘돈 룩 업’(2021)에 등장하는 천문학자인 랜들 민디는 혜성의 지구 충돌 가능성을 예측하지만, 대통령은 코웃음 친다. 한국 영화도 있다. ‘해운대’(2009)에서 정부는 지진해일이 곧 부산을 덮칠 거라는 과학자의 엄중한 경고를 무시한다.



출연연 원장은 과장급 전락하고

관료 전문성 못 쌓는 한국 시스템

외국은 경험 많은 전문가들 포진

관료 밖 전문가 역할 확대 필요

품의제로 패망한 옛 일본제국

중앙일보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왼쪽)이 지난 2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우주항공청 초대청장에 내정된 윤영빈 서울대 교수, 본부장에 내정된 존 리 전 NASA 고위임원, 차장에 내정 된 노경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연구개발정책실장을 소개하고 있다(왼쪽 둘째부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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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직장에 들어와 ‘품의’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말단 직원이 초안을 올리면 위에서 의견을 보태 전결권자가 승인하는 방식이다. 품의제는 미국의 하향식(톱다운)과 다른 일본의 상향식(바텀업) 의사결정 방식이다. 일제 강점기 이래 정부, 민간에서 쓰여왔다. 실무진의 의견이 반영돼 언뜻 민주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최고책임자의 입김이 센 우리의 조직문화에서는 꼭 그렇지도 않다. 오래전 일인데, 일본 기관에서는 30여 개, 대기업에서는 150개 도장을 찍어야 결정이 이뤄졌다는 말도 들린다. 품의제를 따르는 나라로 일본·한국을 꼽는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패망한 이유가 품의제라는 얘기도 있었다. 전시계획을 짜고 작전명령을 내리던 대본영(군국주의 일본의 천황 직속 최고 통수기관)의 작전과 엘리트 참모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그들은 대동아공영권을 꿈꿨다. 누구도 감히 그들이 작성한 작전계획에 토를 달지 않았으며, 곧바로 천황의 결재를 ‘득’했지만, 수 천㎞ 떨어진 도쿄에서 ‘워게임’을 하던 그들은 현장에 무지했다.

‘고등문관시험’은 일본 제국에서 시행한 고급관료 채용시험이다. 패망 후에 ‘국가공무원 1종 시험’에 이어 2013년에는 ‘국가공무원 채용종합직시험’으로 재편됐다. 1950년 도입한 한국판 고등고시는 2010년 5급 공개경쟁 채용시험으로 바뀌었는데, 이 시험은 일본 ‘커리어 관료’와 관련 있다. 일본이 고급관료와 후보생을 등용하는 체계를 ‘커리어 시스템’이라 부른다. 그들은 ‘커리어’와 ‘논(non)커리어’를 엄격히 구별하며, ‘커리어’는 빠른 속도로 승진해 고위직을 독점한다. 패전 후 미 군정은 일본의 신분제적 공무원제를 뜯어고치려 했지만, 거센 저항에 부딪혀 좌절된다. 한국에서는 5급 공무원(사무관)부터 일본의 ‘커리어 관료’에 해당한다. 사무관은 행정고시 같은 공개 채용시험에 합격해 필경사가 손으로 쓴 대통령의 임명장을 받는다. 임금이 과거에 급제한 청년에게 홍패를 하사하던 것이나 다름없다. 20대 중반의 9급 공무원이 단계를 밟아 사무관에 오르려면 50을 넘겨야 하지만, 20대 중반 중앙부처 사무관은 장·차관까지 바라본다. 그리고 대본영 참모들처럼 국가 정책의 초안을 잡는다. 누군가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그러한 권한을 갖는 게 합당하다고 보는가.

30여 년 전, 정부 출연연구원 원장은 차관급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과장급으로 강등됐다. 전문가 집단은 그 자리를 내줬고, 비례해서 그들의 위상은 추락했다. 공무원 중에는 이공계 출신이 부족해 비이공계 학사 출신도 담당 부처의 우주 전담 과장을 맡아왔다. 현장 연구자는 속이 탄다. 신임 비이공계 출신 공무원은 개인과외가 필요할 때도 있다. 한국의 커리어 관료는 다행히 학습 속도가 빠르다. 그러나 그가 같은 자리에 머무는 기간은 평균 1년. 대한민국의 중앙부처들은 그렇게 유지돼왔다. 개인이 아닌 시스템의 결함이며, 커리어 관료도 그 피해자다. 공무원과 해외출장에 동행할 때가 있는데, 그들은 전문 지식과 경험이 부족해 해외 파트너와 친구처럼 어울리기 어렵다. 그들 잘못이 아니다. 5월 말, 문을 여는 우주항공청에 전문가들이 장기간 일할 수 있게 된 건 반가운 소식이다. 최근 발표된 우주항공청 고위급 인선도 환영받는 분위기다.

한국 관료, 한자리 머무르는 시간 1년

해외를 보자. 프랑스와 독일·유럽연합(EU)·일본의 우주 전담기관은 공무원 직제를 따르지 않는, 과학자와 공학자가 주류인 연구개발 조직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드문 예외다. 직원은 공무원 신분이 맞지만, NASA 연구센터와 대학, 국립기관과 기업에서 연구개발로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이다. NASA 본부에서는 그런 경험을 갖춘 과학자와 공학자가 장기계획을 수립·관리한다. 이렇듯 해외 우주 기관을 이끄는 그룹은 분야전문가(field expert) 출신이 대부분이다. 우리도 대학과 출연연, 기업 전문가의 역할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여태 비전문가 그룹이 제시하지 못한 우주항공청의 철학과 비전을 뒤늦게 고민해야 하는 지금, 국내 전문가들도 힘을 보태야 한다. 이제, 우리 영화에서도 ‘프로’들이 활약하는 장면을 보게 되리라.

오는 7월, 국제우주연구위원회(COSPAR) 총회가 부산에서 열린다. 전 세계 우주과학자들이 모이는 행사로 국제천문연맹을 포함, 13개 국제학술단체와 44개국 연구자들이 동참한다. NASA를 비롯한 우주기관의 수장급은 물론, NASA 본부 과학임무국 국장과 본부장들이 온다. 그들은 M2M(달에서 화성까지) 과학연구 외에도 제임스웹 우주망원경과, 국제우주정거장 태양망원경에, 수성에서 명왕성까지 가는 탐사임무 총괄 책임자들이다. 우주항공청의 누가 그들과 손을 맞잡게 될지 궁금해진다.

문홍규 한국천문연구원·우주탐사그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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