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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기자의 시각] 70대 가황과 K팝의 진짜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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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나훈아 라스트 콘서트./예아라 예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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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죽어도, 영영~ 못 잊~을 거야”

지난 27일 가수 나훈아의 인천 콘서트 중 마음에 꽂힌 순간은 단연, ‘영영’의 무대였다. 기존 음원보다 갑자기 40초나 호흡이 길어진 ‘잊’의 음 때문이었다. 그 즉흥 변주에 현장에선 “내가 다 숨차네” 즐거운 비명이 쏟아졌다. 나훈아는 본디 공연의 노래 목록에는 많은 변화를 주는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2시간 반을 꽉 채운 자작곡과 음원에는 없는 색다른 가창, 70대에도 허리께까지 쭉 내린 마이크를 시원하게 뚫는 성량에 다채로운 열광이 쏟아진다.

그런 유의 열광을 최근 K팝 아이돌 산업에선 보기 어렵다. 지난달 하이브 산하 걸그룹 르세라핌이 미국 코첼라 무대 직후 ‘최악의 라이브’ 혹평을 겪을 때, 주변 평론가들은 “보컬은 차라리 걱정보다 나았다”고 반응했다. 립싱크만 뺐을 뿐 기존 음악방송식 무대를 동어반복한 게 더 큰 패착으로 꼽혔다. 라이브 밴드 반주와 즉흥 호흡을 맞추며 의외의 명장면을 탄생시키는 음악 축제 장점을 전혀 활용할 줄도, 즐길 줄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이돌 단독 공연에선 노래 대신 영상과 토크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고작 1시간짜리 공연에 1곡 길이의 인터미션 영상을 4~5개씩 틀기도 한다. 이런 형태의 단독 공연조차 개최가 쉽지 않다. 1시간도 못 채울 만큼 곡이 모자라서다. 빠른 컴백과 음반 판매량 극대화를 위해 1~2곡만 잘라 넣은 싱글 음반 단위로 활동하고, 데뷔 음반조차 4~7곡의 미니 음반이 대다수다. ‘팬콘서트’란 단독 공연 대체 용어마저 생겼다. 콘서트와 팬미팅을 결합한 이 공연 후기에서도 “걱정보단 라이브가 썩 괜찮았다”는 반응이 자주 읽힌다.

가황과 K팝 아이돌의 시간선을 같게 보긴 어려울 것이다. 뛰어난 라이브 능력과 자작곡이 가수의 최우선 조건이던 과거와 달리, 뛰어난 춤선과 그룹 정체성도 중요한 시대다. 라이브가 약한 대신 가상 악기와 보컬 효과를 동원해 완벽해진 음원, 오차 없는 군무에 푹 빠져든 해외 K팝 팬도 많다. 하지만 르세라핌 무대 이후 소셜미디어에선 ‘아이돌 음악방송 앙코르 무대 영상’이 인기를 끌고 있다. 여기서만큼은 립싱크가 아닌 라이브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배경에는 K팝 대기업 그룹들이 국내 음원 차트 상위권을 독식하는 동안, 좋은 음악성 대비 상업성이 적은 팀들은 시선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는 불만이 적지 않다.

K팝 최대 기업인 하이브와 민희진 어도어 대표 간 갈등으로 떠오른 ‘K팝 독창성’ 지적도 비슷한 문제 인식을 품고 있다. 음악성보다 상업적 수익에 몰두한 결과 산하 그룹들의 색이 천편일률화된 게 내홍의 근원이란 것이다. 논란 중심에 낀 그룹 뉴진스도 ‘판에 박히지 않은 음악’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총괄 프로듀서인 민 대표가 떠나면 제 색을 잃을 거란 걱정을 사고 있다. 연출자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는 아이돌. K팝이 당면한 진짜 위기는 대중이 이 고민을 깨닫기 시작한 것일지 모른다.

[윤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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