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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유석재의 돌발史전] 일제가 판 제주도 땅굴진지, 그 문이 다시 닫히게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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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제주 전쟁역사평화박물관 부지 내 가마오름 일제 동굴 진지의 일부. 제주도민에게 굴을 파게 시키는 일본군의 모습이 재현돼 있다. /조선일보 DB.


최근 들어 제주도 유명 맛집을 찾았다가 무척 실망했다는 소비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 가운데 뜻밖에도 제주 올레길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 저로서는 무척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제주시 한경면 한 커피숍의 서비스에 불만을 표시한 어떤 블로그 글을 보게 됐습니다. 아, 그런데.

그곳은 가마오름 아래, 예전에 ‘전쟁역사평화박물관’이 있던 근처이고, 박물관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운영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네이버지도에서 찾아보니 이미 제주도에 ‘평화박물관’이란 곳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돼 있었습니다.

가마오름, 그리고 제주 평화박물관.

문득 15년 전 취재를 위해 그곳에 갔던 생각이 났습니다. 제주공항에서 안개낀 길을 따라 차를 타고 가니 왼쪽 멀리 꿈 속의 풍경인 듯 산방산이 보이는 선경(仙境)같은 행로였습니다.

저의 목적지는 마치 솥뚜껑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처럼 생긴 해발 143m의 가마오름이었습니다. 그곳 땅 속에 미로(迷路)처럼 만들어진 비밀 기지가 있습니다. SF영화나 대체역사소설에 나오는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곳입니다. 해방 직전, 일제는 이곳에 거대한 지하 기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땅굴이 제주도 전체에 120곳이나 있다고 하는데, 가마오름은 이 가운데 최대 규모입니다.

박물관 건물에서 오름 정상 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니 동굴(땅굴)의 입구가 보였습니다. 동굴에 들어서 보니 과연 입이 절로 벌어졌습니다. 조명이 없었다면 누구라도 금세 길을 잃었을 것입니다. 굴은 왼쪽으로 꺾어졌다 다시 오른쪽으로 굴절되며 이어졌습니다. 미공개 지구에는 폭이 넓어졌다가 갑자기 좁아지는 곳이 있는가 하면, 깊이 18m에 이르는 함정(陷穽)과 탱크 한 대가 들어갈 수 있는 넓은 공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곳 땅굴은 총 길이가 2000m에 이르는 3층 구조의 진지이고, 출입구가 33개, 연결통로는 17개라고 했습니다. 복잡하게 이어진 미로 사이사이에 사령관실, 물자보관소, 작전회의실 같은 방이 수십 개라고 했습니다. 마치 이탈리아 로마의 기독교도 지하묘지 카타콤베(catacombe)를 연상케 했습니다.

일제는 왜 이런 것을 제주도에 만들었을까요.

태평양전쟁 말기, 연합군의 일본 열도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최후의 옥쇄(玉碎)형 요새를 만들 기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황해와 동중국해 사이 바다 한가운데로서 연합군이 규슈(九州) 북부로 상륙해 도쿄로 진격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천혜의 요충지가 바로 제주도였던 것입니다.

1945년 2월 9일, 일본군 수뇌부는 연합군의 일본 열도 상륙을 막기 위한 ‘결호(決號) 작전’을 수립했습니다. 그중 특히 강조된 ‘결7호’는 제주도의 요새화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제주도에 58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일본 정규군 96사단·108여단과 만주 관동군의 111·121사단 등 7만5000명의 병력을 제주도에 집결시켰습니다. 당시 한반도 주둔 일본군 22만 명의 3분의 1이 넘는 숫자였습니다.

그렇게 병력이 밀집해 있는 곳을 연합군이 우회해서 상륙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본은 ‘최후의 전투’가 벌어질 장소를 스스로 골랐던 것입니다. 성산 일출봉, 대정 송악산, 어승생악 같은 숱한 제주도 오름(산봉우리)들에 일제는 땅굴을 팠습니다. 그중 가장 큰 요새가 111사단 산하 243·244 보병연대가 주둔했던 가마오름 땅굴이었습니다. 만약 일본의 항복이 늦어졌더라면 제주도에서 커다란 참상이 벌어질 상황이었던 것이죠.

이 가마오름 동굴 진지를 사람들이 찾기 시작한 것은 2004년의 일이었습니다. 그곳에 전쟁역사평화박물관이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너라도 동굴의 참상을 세상에 제대로 알려야 한다!” 2010년 작고한 제주도민 이성찬씨는 일제 말 이곳에 끌려가 강제 노역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뜻에 따라 화물업을 하던 장남 이영근씨가 이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가마오름 일대 1만2000평을 통째로 사들여 사립박물관을 만들고, 땅굴을 일반인에게 개방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소요 예산은 46억원이고 절반은 빚을 내야 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 때부터 이미 ‘원형 훼손과 안전문제가 우려된다’ ‘근대 문화유산을 사유화한 뒤 개발을 통해 관광 사업을 하겠다는 것이냐’는 비판이 일기도 했습니다. 논란 중에는 말이 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을 것도 있겠습니다만, 그때 제가 만난 이영근 제주 전쟁역사평화박물관장은 대단한 집념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습니다.

이영근 관장은 쓰레기 더미를 뒤져가며 당시 일본군이 버리고 간 군복과 각반, 물통, 탄약상자, 수류탄부터 내무반에 걸어 놓았던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 휘호까지 수집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모은 유물이 2800여 점이었습니다.

강제 노역을 당했던 노인 200명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증언을 들은 결과 60시간 분량을 녹화했다고도 합니다.

“곡괭이와 삽만 가지고 하루 종일 굴을 팠지.”

“군수품을 실은 마차를 산으로 끌고 가면… 일본군은 채찍으로 말과 사람을 한꺼번에 후려치며 킬킬 웃었어.”

“환자가 생기면 치료를 해 준다고 데려갔는데, 그 뒤로 다시는 그 사람들을 볼 수 없었어.”

조선일보

2009년 제주평화박물관 내‘제주 가마오름 동굴진지’.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진지에 땅굴작업용 땅다짐기·조명기구·측량기 등을 전시해 놓았다. /조선일보 DB


이영근 관장은 굴 속의 흙을 파내고 버팀목을 다시 세웠습니다. 원래 동굴 입구 사방에 붙어 있었다는 나무 판자를 삼나무로 복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땅굴 전체 길이 중 15% 정도인 300m를 개방했습니다. 이건 과욕이었을까요. 나중에 전문가들로부터 “구축 당시의 원형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시켰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부분입니다.

분명한 것은 당시 이영근 관장의 집념이 대단했다는 것입니다. 매일 새벽과 밤 두 차례 골프장 셔틀버스 운전 아르바이트를 뛰었다고 했습니다. 부족한 박물관 운영비를 보충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박물관을 유지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물어봤습니다.

“전쟁의 비참함과 인류의 어리석음을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제주 가마오름 일제 동굴진지’는 2006년 국가등록문화재 308호가 됐습니다. 평화박물관은 수학여행의 단골 코스가 됐습니다. 2008년 한 해 동안 33만 명이 이곳을 찾았습니다. 일본 고등학교가 수학여행지를 일부로 이곳으로 잡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 학생 대표 두 명이 이 관장을 찾아와 그의 팔을 끌고 강당으로 갔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고개를 숙인 채 꼼짝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흐느끼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학생 대표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희 조상들의 잘못을 사과드립니다… 앞으론 한국과 친구가 되도록 저희가 노력할게요.”

아흔 살쯤 된 일본 노인 한 명이 박물관을 찾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관장에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젊어 군대에 있을 때… 바로 여기에 배치됐었소. 그때 너무 혹독하게 일을 시켜 한국 분들에게 많은 죄를 졌어요.” 노인은 낡은 지갑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만원짜리 지폐 세 장을 빼냈습니다. “이렇게라도 사죄하고 싶으니, 당신 부친께 꼭 전해 주시오.”

이 관장이 병석의 아버지에게 그걸 전하고 사연을 말하자, 부친은 짐작 가는 데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해방이 되자 일본군은 군복을 벗어 던지고 민간인 옷을 입은 채 도망갔다. 그때 내가 사복을 구해 줬다.”

깜짝 놀란 이 관장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아버지!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

“도대체 왜…”

“시킨 사람이 나쁘지, 그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느냐? 전쟁이 끝나니 그 사람들도 울고 빌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

제가 그곳을 찾아 이영근 관장을 만난 것은 2009년. 박물관의 쇠락(衰落)이 찾아온 것은 그 뒤의 일이었습니다. 아주 냉정하고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부채 덩어리인 사설 박물관의 운영 실패’로 정리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의 말은 달랐습니다. 우선 구제역, 조류독감, 신종플루라는 전염병 3종 세트 때문에 관람 학생 수가 연 10만명이나 줄었습니다. 거기에 결정타 한 방이 더해지게 됩니다.

이영근 관장이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찬성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박물관에 큰 글씨로 붙어 있었던 문구, ‘자유와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는 말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관장은 “평화란 힘이 있을 때 지켜지는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파는 예상보다 컸습니다. 박물관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관람객의 씨를 말려 버리겠다’는 협박 전화도 걸려왔다고 합니다. 누가 개입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학생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고 합니다.

그다음부턴 차마 믿기 어려운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빚을 감당하기 어려운 나머지 박물관을 일본인에게 넘기겠다는 얘기였습니다. 2006년에 웬 일본인들이 찾아와 ‘원하는 대로 돈을 줄 테니 우리에게 팔라’고 하기에 명함을 북북 찢어 버렸는데, 이제 다시 그들을 찾기 위해 일본 신문에 광고를 내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획이 알려지자 ‘일제 침략 잔재를 일본에 넘길 수는 없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문화재청은 동굴을 매입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감정가에 비해 너무 비싸게 사는 것 같다’ ‘일본인과 20억 엔 계약서를 작성했다는 등 자꾸 매각설을 들고 나오며 매입을 압박하고 있다’는 등 추문(醜聞)으로 볼 수 있는 얘기들도 흘러나왔습니다.

2013년 4월 4일, 문화재위원회 근대문화재분과 회의에 짤막한 안건 한 건이 접수됐습니다. ‘가마오름 일제 동굴진지 매입 완료.’ 매입 금액 59억1500만원. 이미 지원한 보조금을 회수하고 남은 실 매입금액은 49억8000만원이었습니다. 문화재청이 32억원, 제주도가 27억1500만원을 냈습니다. 매입 완료 소식을 들은 뒤 이영근 관장과 통화하려 했으나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한때 제가 목격했던 그의 열정, 수많은 지인들을 단톡방에 초대해 놓고 ‘나는 땅굴사나이’라 외치던 그의 패기가 아직도 남아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래도록 ‘휴관’으로 돼 있던 제주 전쟁역사평화박물관은 끝내 문을 닫았고 지금은 건물만 남아 있습니다. 박물관 주차장은 가마오름 등반객을 위한 무료 주차장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나라에서 매입한 동굴진지는 문이 굳게 닫힌 채 표지판만 세워져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려면 왜 국민 세금 60억 원을 들인 것인지 모르겠는데, 일본과 관련된 유적을 공개하며 관리하기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고, 굳이 그곳을 개방하지 않아도 제주도엔 관광지가 많다고 여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됐든 그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자 ‘반면교사(反面敎師)의 문화재’는 또 다시 땅속으로 묻혀 버린 셈입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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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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