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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0.78㎝ 차이’ 칼같은 판정… ‘로봇 심판’이 야구를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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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실의 뉴스 읽기] ABS 실제 도입해보니

2024년 3월 한국 프로야구에 ‘로봇 심판’이 본격 등장했다. 볼·스트라이크 판정을 맡는 ‘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Automatic Ball-Strike System·ABS)’이다. 카메라로 공 궤적을 추적해 판정을 내린 뒤 인간 심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1군 리그에 ABS를 도입한 건 한국이 세계 최초다. 미국에선 몇 년째 마이너리그에서 테스트 중이다. KBO(한국야구위원회) 정규시즌 개막 한 달여가 지난 현재 ABS는 뜨거운 관심 속에 야구장 풍경을 조금씩 바꿔놓고 있다. 인간 심판들이 기계에 오류 책임을 전가하는 등 예상치 못했던 논란도 일어났다.

조선일보

그래픽=김현국


◇ABS가 만들어낸 낯선 풍경

3월 초 시범경기부터 ABS가 전격 도입되면서 우선 주심과 선수·감독이 볼·스트라이크 판정 때문에 경기 중 서로 얼굴 붉히며 갈등 빚는 장면은 사라졌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판정이 나와도 투수나 타자나 흠칫 놀라거나 황당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양팀 더그아웃에는 ABS 판정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이어폰과 태블릿이 지급됐다. ABS 판정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한 인간 심판들이 기계 오류로 몰고 가려다 물의를 빚은 사건을 계기로 이어폰이 추가됐다. 태블릿에 ABS 판정 결과가 전송되는 속도가 느려 실시간 확인이 어렵다는 문제점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구단별로 코치나 전력분석원 등이 경기 중 이어폰을 착용한다. KBO는 신호등처럼 빨간불과 초록불로 볼·스트라이크를 실시간 표시하는 판정등 도입도 검토 중이다.

포수 역할에도 변화가 생겼다. 포수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 중 하나였던 프레이밍 기술이 무의미해졌다. 프레이밍은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나는 공을 스트라이크처럼 보이도록 하는 포구 기술이다. 하지만 포수가 공 받는 위치를 옮겨도 ABS 시스템에는 반영되지 않는다. 공의 궤적이 홈플레이트 중간면과 끝면 기준만 통과한다면 포수 위치와 자세는 판정과 상관이 없다. 포수가 공 받는 순간 미트가 아래로 처지거나 땅으로 덮으면서 받을 때, 포수 사인과 반대로 투구할 때, 포수가 도루 저지를 위해 공을 잡고 빠르게 빼서 던질 때도 과거엔 볼 판정이 많았다. 이제는 스트라이크 존만 통과했다면 스트라이크다.

ABS 도입으로 볼넷이 늘어날 거란 우려가 있었으나 3월 23일 정규시즌 개막 후 지난달 30일까지 158경기에서 볼넷은 1169개로 지난해(1164개)와 비슷했다. 반면 홈런은 188개에서 302개로 크게 늘었다. 전문가들은 홈런 증가에 ABS 영향이 있는지 주목하고 있다. 타자가 투수보다 ABS에 잘 적응했다거나, ABS가 높은 공을 스트라이크로 판정하는 경향이 있어 투수가 이를 활용하려다 장타를 허용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조선일보

그래픽=김현국


◇추적 실패, 판정 불만…논란의 ABS

리그가 진행될수록 일부 선수와 감독은 ABS에 대해 강도 높은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인간 심판을 향하던 불만이 ABS를 도입·운영하는 KBO로 향한다. 상당 부분은 ABS에 설정된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불만이다. KBO는 이번 시즌을 앞두고 타자 키를 기준으로 존을 설정했고, ABS가 이를 칼같이 적용하면서 선수들이 인식하는 존과 괴리가 나타났다. ABS는 존 상단 양쪽 모서리, 포수가 받기 어려울 만큼 낮은 공도 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리곤 한다. 타자마다 타격 자세가 다른데 단순히 키를 기준으로 삼은 것도 선수에 따라 유불리가 있다는 불만이 나온다.

스트라이크 존 설정이 문제라면 시즌 중간에는 어려워도 시즌 종료 후 의견을 반영해 조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구장마다, 심지어 날씨에 따라 존이 달라진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각 구장 카메라 설치 위치와 각도 등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A구장은 다른 구장보다 좌우 기준이 넓다” “B구장은 C구장보다 상한선 기준이 높다” 같은 얘기가 돈다. 여기에 대스타 류현진이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주장까지 추가해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지난달 24일 경기에서 경계선에 살짝 걸친 듯한 공이 여러 차례 볼로 판정되자 ‘경기마다 존이 달라진다’는 취지로 불만을 드러냈다.

KBO는 곧바로 투구 추적 데이터를 공개하며 맞대응했다. 류현진이 문제를 제기한 투구가 0.78cm 차이로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KBO는 “기준은 전 구장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며, 정확한 비교 테스트가 완료되면 상세 비교 자료를 배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베테랑 타자 황재균은 지난달 26일 ‘ABS 관련 첫 퇴장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스트라이크가 선언되자 헬멧을 집어던졌다. 황재균은 “19년 프로 생활 하며 처음 당한 퇴장이었다. 칠 수 없는 공이 스트라이크가 되기도 한다”고 했다. 베테랑 선수일수록 ABS 적응을 힘들어하는 경향도 보인다. 추신수는 “한국 야구의 변화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지금까지 정립해왔던 것들이 무의미해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기계적 결함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날벌레 등 이물질이 카메라 영역에 침범해 한 경기에 두 번씩 투구 추적 실패 사례가 나오기도 했다. 수신기가 작동되지 않는 일도 생겼다. ABS가 투구 추적에 실패하는 경우에는 전처럼 주심이 자체적으로 판정을 내려야 한다. KBO는 여름철 카메라 주변 벌레를 막기 위한 작업도 준비 중이다.

◇팬들은 환영…”100% 찬성” 감독도

많은 야구 팬들은 불필요한 감정 소모 없이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다며 ABS 도입을 반긴다. “신의 한 수” “칼같이 정확해 속이 시원하다” “뒤끝도 스트레스도 없어 대찬성 대만족” “구장마다 다르다 해도 심판마다 다른 것보다는 낫다”는 댓글이 달린다. 인간 심판의 심리적·상황적 편향이 제거되고 판정에 일관성이 유지되는 것이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감정이나 편견이 개입되지 않아 마음 편하다”는 선수도 많다.

불만을 토로하는 선수들도 대체로 ABS가 결국 가야 할 방향이라고는 생각한다. 젊은 팬들이 공정에 민감한 세대이기에 더욱 그렇다. 선수들이 적응할 시간이 부족했고, 선수 의견을 반영하는 절차가 생략됐다는 지적이 주로 나온다. 홍원기 키움 감독은 “솔직히 갸우뚱할 때는 있어도 우리 팀은 100% 찬성”이라며 “기계가 하는 것이라 가장 깔끔하다. 보완점이 필요하면 찾으면 된다”고 했다. 염경엽 LG 감독은 “ABS 자체는 형평성이나 공정성에서 심판들보다 낫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로봇 심판’ ABS 어떻게 운영되나

KBO는 2020년부터 ABS를 퓨처스(2군) 리그에서 시범 운영해왔다. “모든 투수와 타자가 동일한 스트라이크 존 판정을 적용받을 수 있어 공정한 경기 진행이 가능하다”며 올 시즌 시범경기부터 KBO 리그에 전격 도입했다.

1루와 3루, 외야 중앙쪽에 설치된 카메라 3대가 타자별 스트라이크 존을 설정하고, 투수 공 궤적을 추적해 실시간으로 위치 값을 전송하면 컴퓨터가 볼·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린다. 그 결과를 주심이 이어폰 수신 장비를 통해 전달받는다. 스트라이크는 남성, 볼은 여성 음성으로 들리도록 구분했다. 주심은 이를 수신호와 콜로 선수들에게 알린다.

야구 규칙상 스트라이크 존은 홈플레이트 상공에서 ‘어깨 윗부분과 바지 윗부분 중간의 수평선’을 상한선으로, ‘무릎 아랫부분’을 하한선으로 정한다. 타격 자세를 취한 타자가 기준이다. 이를 심판들이 각자 눈과 감으로 판정해왔다. KBO는 “ABS의 스트라이크 존은 야구 규칙상의 존과 기존 심판의 평균 존 모두를 최대한 가깝게 설정하기 위해 다양한 데이터를 활용했다”며 “선수단이 인식하고 있는 스트라이크 존과 최대한 유사하게 구현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밝혔다. 그 결과, 상한선은 타자 키의 56.35%, 하한선은 27.64%로 홈플레이트 중간면과 끝면 두 곳에서 판정하도록 했다. 중간면과 끝면 기준을 모두 통과해야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는다. 끝면 기준은 중간면보다 1.5cm 낮췄다. 좌우는 홈플레이트 크기 43.18cm에 좌우로 각각 2cm씩 확대 적용해 중간면에서 한 번만 판정한다.

ABS 판정 결과는 최종적이며 이의 제기나 항의를 할 수 없다. 시스템 오류 가능성이 명백히 의심되는 경우에는 감독이 심판에게 확인 요청을 할 수 있다. 기계가 정상적으로 운영된다면 심판은 ABS 판정에 따라야 한다.

[최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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