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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사설]AI칩 살 돈 없어 긁어모은 게임칩으로 연구하는 대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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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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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 기술전쟁의 일선에 있는 대학 연구진들이 예산 부족으로 최신 AI 칩을 확보하지 못해 연구에 차질을 빚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성형 AI 모델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엔비디아의 최신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구하지 못해 급하게 긁어모은 구형(舊型) 게임용 GPU로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연구자들 사이에선 “다른 나라들은 대포를 들고 싸우는데 우리는 총 한 자루 들고 기술전쟁에 뛰어든 셈”이라는 한탄이 나온다.

일차적인 이유는 AI 칩 가격은 뛰고 있는데 대학 연구비가 이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AI 시장이 확대되면서 GPU 등은 수요 대비 공급이 부족해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일반적 수준의 AI 연구를 하려고 해도 최소 5억 원은 필요한데, 교수들의 연간 연구비는 절반 수준에 그쳐 제대로 된 연구를 하기 힘들다. 현재 대학들이 쓰는 구형 칩과 장비를 이용해 세계 최신 수준과 유사한 서비스를 구현하려면 150년 가까이 걸릴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어렵게 칩을 확보해도 대학 내 전력 부족으로 구동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교수들이 직접 전력이 남는 건물을 찾아 뛰어다녀야 한다. 가용 전력은 포화상태인데 추가 전력 확보 계획은 없는 상태다. 정부가 기업과 대학에 무상으로 GPU를 제공하는 사업 규모는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기업의 기부나 투자로 대학에 GPU를 대규모로 공급하는 미국이나, 정부 차원에서 여러 대학에 공동으로 데이터와 컴퓨팅 인프라를 지원하는 캐나다에 한참 뒤처진다. 심지어 AI 경쟁에서 국가적 전략 자산이 될 슈퍼컴퓨터 6호기 구축 사업도 예산 부족으로 지지부진하다.

상황이 이러니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국내 AI 인력들은 현실에 실망해 해외로 떠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들이 엄청난 연봉을 앞세워 AI 핵심 인재 쟁탈전을 벌이는 것과는 정반대다. 고급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보상만큼이나 연구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 해외에서 일하는 한국인 AI 연구자들에게 귀국을 고려할 만한 조건을 물었더니 우수한 동료 연구진과 AI 연구 인프라를 우선적으로 꼽았다.

정부는 AI 분야에서 G3(주요 3개국)로 도약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놨지만 열악한 연구 여건과 인재 유출을 방치하면 공허한 외침에 그칠 수 있다. 아직은 AI 기술전쟁이 초기 단계라 주도권을 선점할 기회는 있다. 하지만 더 머뭇거리다간 영영 실기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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