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8 (토)

[편집자 레터] 童心이 빛날 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곽아람 Books 팀장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한복판,/ 배고픈 시절을 보내던 중학생 시절에/ 빨강 머리 앤이 홀연히 나타났었지./ 빨강 머리털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내게/ 주근깨가 한가득이라는 얼굴도 궁금했지./ 억울해도 늘 웃고 뛰논다는 앤이 부러워/ 어린 하늘의 기쁨만 보며 살고 싶었지만/ 전쟁이 끝난 동네에는 한가득 먼지만 일고/ 꿈속의 그 애인은 먼 서양에 살고 있다니.”

마종기 시집 ‘천사의 탄식’에서 읽었습니다. 시의 제목은 ‘빨강 머리 앤’. 시인은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소녀 ‘앤’의 안부가 궁금해 소설 배경인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섬을 찾아갑니다. 빨간 사과를 주렁주렁 단 가로수가 서 있는 시골마을로 차를 타고 접어들던 중, 먼지 날리던 고속도로에 서 있는 초라한 목조 단층 건물 간판의 ‘제주식당’이라는 글씨에 눈이 가지요. 소설 속 앤이 살았던 초록 지붕 집, 책에 나오는 시내와 학교, 작가의 무덤을 둘러싼 꽃다발을 보면서도 시인은 내내 먼지 쓴 제주식당에 가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아마도 제주도 출신일 식당 주인에, 27세 때 도미(渡美)해 이방인으로 살고 있는 시인 자신이 겹치며 이런 시구(詩句)를 낳습니다. “초라한 내 어린 날이여,/ 누가 이곳까지 와서 살게 될 줄 알았을까./ 제주도를 떠나 캐나다의 변경에까지 온/ 방랑벽이여, 혹은 부끄러운 가난이여,/ 제주식당에서 얼큰한 김치찌개로 식사를 마치고/ 한국말을 나누면서 주인과 악수라도 했다면/ 혹시 내가 먼저 소주 한 병을 더 찾았겠지.”

디아스포라의 정서와 함께 “내가 사랑했던 앤은 올해로 백열 살이 되었지만”이라며 ‘앤’의 나이를 세어보는 80대 시인의 동심이 빛나는 시. 마종기 시인의 부친 마해송은 동화 작가였죠. 대표작 ‘바위나리와 아기별’(1923)은 한국 최초 창작 동화입니다. 내일은 어린이날. 마음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동심을 한번쯤 꺼내 보세요. /곽아람 Books 팀장

[곽아람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