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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일제 강점기 조선 최고 부자의 ‘정경유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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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용제일주의’가 경영 전략. 1916년 열네살 때부터 객주업을 했다. 1920년대에 지역 최대 지주가 됐고 인쇄업과 종이사업으로 사업을 확장. 1931년 화신상회를 인수했고 백화점으로 개편. 유명한 화신백화점이다.



‘조선 사람이 경영하는 백화점’을 내세웠다. 조선 왕족 영친왕을 데려와 화신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게 해 홍보에 이용하고 싶어 했다. 영친왕은 공식적인 방문 요청은 거절했지만, 1933년에 화신백화점에서 물건을 샀다. 박흥식은 훗날 영친왕이 비행기 티켓 값이 없어 고생할 때 비싼 돈을 주고 대신 구해주었다. ‘민족주의 마케팅’을 잘 이용했다. 그러면서도 조선총독부와 정경유착을 했다.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과 친했고, 화재 때문에 백화점 건물이 피해를 보자 종로경찰서 구관을 임대해 사용하는 특혜를 땄다.



“민족을 욕보인 적 없다. 나는 친일파로 매도되는 것이 평생의 한이다.” 자기 딴에는 억울하다고 했다. 태평양 전쟁 때 비행기 공장을 세워 2500명의 조선인 청년을 고용한 일도, ‘조선인 청년들이 일본의 탄광이나 동남아시아 전쟁터로 끌려가 “값진 목숨을 개죽음당하는” 것을 피하게 하고자 함’이었다고 주장했다.



본인 주장은 그렇다 치고, 일본 당국과 참으로 가깝게 지냈다. 비행기 공장의 정체도 태평양 전쟁 때 써먹을 전투기와 폭격기를 생산할 군수 공장이었다. 조선인 청년의 희생을 막고 싶었다면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 따위 단체에서 이사로 활동. 조선인 청년더러 전쟁터에 나가라고 연설하고 다니는 단체였다. 1940년대에는 일본 당국과 결탁하여 동남아시아 사업에 진출하겠다며 현지 조사를 벌였다.



1948년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제일 먼저 체포한 사람이 박흥식. 같이 친일 행각을 했던 정치권과 문화계 인사보다 앞서 잡혀간 상황이 억울하긴 했겠다. 반민특위가 흐지부지되자 일없이 풀려났다. 사업을 계속했다. 본인 주장에 따르면 1960년대에 박정희와 함께 원자력발전소를 지으려 했다고 한다. 말년에 화신백화점은 부도를 냈다. 세상을 떠난 날이 1994년 5월10일이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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