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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사람을 입는다, 시간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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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박준의 마음 쓰기] (3)

조선일보

일러스트=유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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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을 정리했습니다. 별다르게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평소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니 큰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정리를 앞두고 옷의 부피를 획기적으로 줄여준다는 압축 비닐도 준비해두었습니다. 옷장 안에는 크게 세 종류의 옷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철 지난 옷입니다. 지난겨울 입었던 두꺼운 외투들은 동네 세탁소에서 드라이클리닝을 해오며 받아둔 얇은 비닐에 덮여 있습니다. 혹시 모를 꽃샘추위를 생각해 그냥 두었던 몇 개의 웃옷은 꺼내 새로 빨아두었습니다.

둘째는 안 입는 옷입니다. 유행이 지난 옷, 유행을 타는 모양새는 아니지만 이제 몸에 맞지 않게 된 옷, 세탁 요령에 맞춰 딱 두 번 빨았는데 색이 바랜 옷, 인터넷 화면으로 볼 때는 참 고왔는데 입어보니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옷, 직장 동료가 똑같은 옷을 입고 출근하는 탓에 매번 손이 가지 않는 옷. 하지만 이 옷들은 당장 버릴 수 없습니다. 어딘가 아까운 마음이 드는 까닭입니다. 혹여나 긴요하게 입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음 옷장을 정리할 때 높은 확률로 헌 옷 수거함에 들어갈 것입니다. 더 높은 확률로 저는 ‘아 그냥 지난번에 버릴걸, 괜히 자리만 차지하게 두었네’ 하고 후회할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못 입는 옷이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차마 아까워서 입지 못하는 옷입니다. 실크나 캐시미어처럼 귀한 소재라서가 아닙니다. 고가의 명품 브랜드 옷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옷들에는 모두 사람과 시간이 깃들어 있습니다. 옷장 가장 구석의 회색빛 양복은 취업을 준비하던 때 아버지가 사준 것입니다. 지나치게 나이 들어 보이는 색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당시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 양복 옆에는 익살스러운 캐릭터가 그려진 반소매 티셔츠가 있습니다. 어느 해, 생일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한번 입어 보기도 전에 선물을 건넨 사람이 멀리 떠났습니다. 그 후로 몇 번 바닥에 펼쳐 둔 게 전부입니다. 손으로 쓸어보는 일도 아까워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언제쯤이면 이 티셔츠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는 슬픔이 마를까요? 그때쯤이면 입어 볼 수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외에도 사람과 시간이 애틋하게 뒤섞인 옷이 몇 벌 더 있습니다.

옷장 문을 닫습니다. 옷장 속을 획기적으로 비워보겠다는 처음 계획이 무색해질 만큼 정리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옷들이 숨을 쉴 수 있게 적당한 사이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 모든 것들은 사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한낮은 봄과 여름 사이에 있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늦은 밤은 어제와 오늘 사이에 있는 듯합니다. 메마른 눈동자를 지그시 감았다 새로 눈을 뜨는 사이에 시선이 머뭅니다. 뒷걸음질을 쳐도 과거 머물던 곳에 가지 못하고 급하게 내디뎌도 시간을 넘어서지는 못하겠지만 사람의 생각만큼은 이 사이사이를 가득 채우고 자유롭게 넘나듭니다.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이 간판이 하나 걸린다.”(유희경 시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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