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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4 (화)

발작·졸음에 뺏긴 미래… 장애 인정도 어려워 두 번 운다 [심층기획-기댈 곳 없는 기면증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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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기준 국내 기면증 환자 6646명

정신병적 증상 아닌 신경계 질환인데도

복지부, 2021년 ‘정신장애’로 등록 허용

졸음·환청 등 증상만으론 장애 불인정

중증 정신장애 동반되어야 겨우 인정돼

법 개정 이후 장애 인정 환자 겨우 4명

‘조는 학생 나태’ 치부하는 교실 환경 탓

조기 치료 중요하지만 질환 인지 늦어져

상태 악화로 학업·취업 실패 고통 빈번

따사로운 햇살이 기지개를 켜는 봄, 눈꺼풀이 한층 무겁게 내려앉는 계절이다. 중요한 일을 앞둔 학생들과 직장인은 고카페인 음료를 찾는 등 갖은 방법으로 졸음을 떨쳐내겠지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기억까지 앗아가는 졸음을 피하지 못해 ‘게으름뱅이’ 낙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바로 ‘기면증’ 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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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반에 기면증이 발병한 오재현(41)씨는 주간 졸음뿐 아니라 일상생활 중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거나 환각·환청 등에 시달리는 제1형(중증) 기면증 환자다. 오씨는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디자인 회사에 취업했지만, 졸음 증상과 발작 증상이 점차 심화하면서 회사를 관뒀다.

졸다 버스·지하철 정거장을 지나쳐 지각하는 일은 오씨에겐 예삿일이다. 친구들과 대화하거나 장거리 운전할 때도 졸음과 발작 증세가 잦아지면서 오씨는 사람들을 만나기조차 두려워졌다. 그는 “사회활동을 포기하면서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고, 우울증이 생겼다”며 “질병인데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하니 더 움츠러들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씨와 같은 기면증 환자들은 학업·취업 전선에서 번번이 좌절을 맛보며 대인기피증·우울증 등에 시달리지만, ‘의지박약’이라는 사회적 편견과 까다로운 장애 인정 조건으로 이중고를 겪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증 정신질환 필수’ 기면증 장애인정 4명뿐

21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국내 기면증 환자 수는 6646명으로, 기면증은 인구 10만명당 13명꼴로 발생하는 희귀질환이다. 뇌의 시상하부에서 각성 물질인 ‘하이포크레틴’의 분비가 줄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신경계 질환으로, 낮 시간의 과도한 졸림과 갑작스러운 발작 증세(탈력발작), 불면·환각 등이 주된 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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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면증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환자들을 더 힘들게 만드는 문제는 까다로운 장애 판정 기준이다. 보건복지부가 2021년 4월13일 ‘장애인복지법 시행령’ 등을 개정·공포하면서 기면증을 ‘정신장애’로 등록할 수 있게 됐다. 다만, 주간졸음·탈력발작·환청 등의 기면증 증상만으로는 장애 판정을 받을 수 없다. 기면증과 더불어 중증 정신질환을 동반하는 경우에만 정신장애로 인정되어서다.

환자들은 개정안이 ‘엉터리’라고 입을 모았다. 기면증이 정신병적 증상이 아닌 신경계 질환이기 때문이다.

한국기면병환우협회 회원 A씨는 “50일 된 아기를 목욕시키다 아기가 헤실헤실 웃는 게 귀여워 기쁜 마음이 들자 힘이 풀렸다”며 “아기는 물속에 빠지고 저는 하염없이 울었다. 아기를 안고 있다 놓치기도 하고, 업은 채로 주저앉는 일이 많다”고 고백했다. 이어 “그런데도 심각한 정신질환이 없어 장애신청을 반려당했다”며 “정신질환이 있으면 정신장애 신청을 하지 왜 기면증으로 신청하겠나”라고 속앓이했다.

복지부의 주관적인 정신질환 인정 기준도 문제로 지적된다. 한국기면증환우협회에 따르면 자살충동을 겪을 정도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환자일지라도, 복지부의 ‘일상생활에 상당한 제한이 있는 경우’라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장애 판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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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 환우협회장은 “사회생활이 어려워 수년간 집에만 머무른 기면증 환자가 재발성 우울장애 2년치 진료기록지를 제출했음에도 이의신청에서 반려당했다”며 “정신질환을 증명해도 장애 판정을 받지 못하는 환자가 많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법 개정 이후 이날까지 기면증으로 장애인정을 받은 환자 수는 4명에 그쳤다. 이의신청을 포함해 38건이 반려됐다.

정기영 서울대 신경과 교수는 “기면병 환자들은 심하게 졸리고 탈력발작으로 인해서 일상생활에 장애를 겪는 게 주된 문제”라며 “현행 장애 측정 기준은 기면병과 관련성이 전혀 없는 기준들로 이뤄져 장애 정도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면병이 정신질환 쪽 카테고리에 들어간 게 행정 편의적 측면이 있지 않았나”라며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장애 인정 장벽이 높은 질환 등에 대한 장애 인정 기준 타당성 검토를 진행 중이다. 2차 연구용역을 올해 상반기 중 마칠 것”이라며 “질환을 어느 정도까지 장애로 인정해줄 것인지가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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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 사진.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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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르다’ 편견에 늦어지는 치료

기면증은 완치가 불가능하지만, 약을 먹으면 증상을 완화할 순 있다. 10대 청소년 시기에 주로 발생하지만, 환자들은 기면증을 ‘질병’으로 인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학생들이 만성 피로에 시달리는 한국의 교육 현실과 조는 학생을 ‘나태한 문제 학생’ 정도로 치부하는 교실 환경 탓이었다. 늦어지는 치료 시기만큼 학업과 취업에서 실패의 가능성은 커졌다.

기면증 발병 시기를 청소년기로 기억하는 김모(43)씨는 23살이 돼서야 병원을 처음 찾았다. 김씨는 “고등학교 시절엔 수업 시간에 많이들 졸다 보니 문제라고 인지하지 못했다”며 “수능 시험날조차 수차례 졸음이 쏟아져 재수를 했고, 법학과 진학 후 본격 고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심각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김씨는 기면증을 ‘밤을 새우고 난 다음 날 같은 상태가 매 순간 지속되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기면증 환자들은 졸음에 빠진 순간 기존처럼 움직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움직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간대별로 나눠 약물을 복용하거나 10∼15분이라도 짧은 낮잠을 자는 것이 각성 상태를 유지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지만, 기면증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현실에서 환자들이 이러한 배려를 받기란 쉽지 않다.

김씨는 “결국 공부를 포기했고, 지금은 재택근무로 할 수 있는 일들만 하고 있다”며 “도박·흡연 예방교육처럼 교사들이 인지하고 있다면, 학생 때 발병하는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나 또한 조금 더 일찍 병을 알았다면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국회에서는 지난해 11월 국민의힘 이종성 의원이 대표발의한 ‘희귀질환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보건복지위원회에 상정되며 기면증 등 희귀질환자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해당 개정안은 희귀질환의 예방과 조기진단을 위한 교육 및 진단 지원, 환자 돌봄지원 등의 근거를 신설함으로써 희귀질환에 대한 국가관리체계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끝내 21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채 폐기를 앞두고 있다.

김나현 기자 lapiz@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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