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샷건의 집현전]<7> 자강두천: 수준 높은 결투에서 '도토리 키재기'로 전락
온라인에서 두 라이벌이 맞붙는 상황이 될 때마다 흔히 '자강두천'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언뜻 사자성어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을 줄인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용호상박' 정도가 되겠죠.
하지만 정작 이 표현을 '천재'들에게는 잘 쓰지 않습니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두 명이 치열하게 대립하거나 갈등할 때 주로 쓰입니다. 실제 용례를 보면 '도토리 키재기'라는 표현과 더 비슷합니다. '천재의 대결'이던 이 용어의 의미가 변한 데는 유명한 프로게이머의 슬럼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LoL(롤, 리그오브레전드)에서 가장 유명한 게이머는 단연 '페이커' 이상혁입니다. 지난해까지 공식 상금만 20억원 넘게 벌어들이며 글로벌 넘버원 플레이어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레전드이자 롤 천재로 꼽힙니다. 2017년 유튜버 '봄바야'가 페이커와 게임 BJ '도파'의 대결을 편집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면서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새벽 솔랭(솔로랭크) 3연전 마지막 경기'라는 제목을 붙이며 '자강두천'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말뜻 그대로 '천재들이 벌이는 높은 수준의 싸움'으로 통했습니다.
하지만 페이커에게도 슬럼프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듬해 들어 페이커의 폼이 떨어지면서 종종 졸전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이후 디씨인사이드 롤 갤러리 등에서 페이커의 경기력을 조롱하는 일부 누리꾼들이 상대방 플레이어 역시 수준 이하의 경기력을 보여줄 때면 '자강두천'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졸전' 내지는 '하수들의 싸움'을 뜻하는 반어적 의미의 자강두천이 탄생했습니다.
게임계를 넘어서 의미가 확장되다 보니, 2022년 한 부장판사는 소송에서 사건과 불필요한 주장과 반박을 통해 열띤 공방을 벌이는 이들이 법원의 심판 역량을 갉아먹는다며 '자강두천'이라고 비꼬는 기고를 내기도 했습니다.
과거 온라인 용어 중에 비슷한 뜻으로는 '병림픽'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다만 이 용어는 장애인을 비하하는 의미가 내포돼 있어 잘 사용하지 않게 됐습니다. 고만고만한 플레이어의 수가 늘어날수록 '자강세천' '자강네천'으로 부르는 응용형 표현도 있습니다.
최우영 기자 young@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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