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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강제승진’으로 인한 우울증과 자살…법원 “산업재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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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게티이미지 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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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 않은 승진으로 발병한 우울증과 이에 뒤따른 노동자의 자살이 법원에서 산업재해로 인정됐다. 성과에 대한 압박감, 동료들과의 불화로 촉발된 우울증이 6년 넘게 지속돼 자살의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재판장 박정대)는 23년 동안 전투기 제작업체에서 근무하다 2020년 7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ㄱ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26일 밝혔다.



판결문을 보면, 1997년 입사해 전투기 조립업무를 하던 ㄱ씨는 2013년 해외출장 중에 ‘조장’ 승진 소식을 들었다. ㄱ씨는 승진을 원치 않았지만, 회사는 이를 무시한채 “업무능력이 탁월하다”는 이유로 2014년 1월부터 승진 발령했다. 그는 전투기 최종 조립공정을 맡는 조의 조장으로 일하며 성과 압박감과 조원의 업무 태만에 따른 납기지연, 조원들과의 불화 등으로 스트레스가 심해져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았다. 2015년부터 다시 조원으로 발령났지만, 2017년부터는 팀장 지시를 현장에 전달하는 중간관리자 발령받아 현장과 관리자 사이를 조율하며 발생하는 스트레스로 우울증이 지속됐다.



2020년 4월부터는 다른 기종의 전투기 조립업무를 맡으면서 더욱 심각해졌다. 회사가 조장과 중간관리자로 고생했던 자신의 의사를 무시한 채, 까마득한 후배한테 처음부터 배워가며 해야 하고, 체력적 부담이 큰 업무를 맡긴 것에 대한 상실감이 컸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ㄱ씨는 “나는 회사에서 왕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동료들과 대화도 없이 낯빛이 어두워졌다 한다. 결국 ㄱ씨는 2020년 5월, 6월, 7월 자살시도 세번째 만에 목숨을 끊었다. 근로복지공단은 유족의 유족급여 지급청구에 “자살이 업무상 이유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며 산재로 승인하지 않았다. ㄱ씨가 정신과 상담과정에서 직장에서의 일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유, 모친 간병 등에 대한 스트레스도 함께 언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2014년 조장 인사발령 이전에는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과적 병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업무상 사유에 근거한 스트레스로 우울증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극단적 선택에 이르렀다는 것 외에 ㄱ씨의 자살을 설명할 수 있는 동기나 계기가 보이지 않는다”며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이어 “갑작스런 인사조처,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면서 발생한 구성원과의 불화, 성과에 대한 압박감, 업무 고충에 관한 소통 창구의 부재(스트레스 호소에 대한 무반응) 등의 업무적 요소들은 우울증 발병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 상태가 자살 실행 당시까지도 장기간 지속됐던 것으로 보인다”며 “ㄱ씨는 자살시도 사실을 회사에 전혀 알리지 않았는데, 이는 ㄱ씨가 직장내 소통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회사가 제공하는 심리상담 등의 지원체계에 대한 신뢰가 없었음을 보여준다”고 짚었다.



유족을 대리한 이성영 변호사(심산법률사무소)는 “노동자가 원하지 않는 강제승진으로 발생한 스트레스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한 사실상 첫 판결”이라며 “건강하고 유능하며 책임감 있었던 ㄱ씨의 죽음이 단순한 개인적 취약에 따른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인사시스템과 직장내괴롭힘, 스트레스 때문이었음을 법원이 인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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