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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다시 기업가 정신] "실패를 다시 거론하지 말라!" 애국적 인재경영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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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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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기업의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이었다."

SK그룹을 전 세계가 집중하고 있다. 그 이유는 생성형 인공지능(AI) 개발을 위한 그래픽처리장치(GPU)와 AI칩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메모리(HBM) 때문이다. HBM은 연산속도를 크게 향상시키고 전력 소모 비용을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SK는 HBM 기술에서 최고 수준을 확보한 1등 강자다. SK하이닉스는 HBM 시장 점유율 1위 기업으로 전체의 53%를 차지하고 있다. 2위는 삼성전자(38%), 3위는 마이크론(9%)으로 SK하이닉스와 큰 격차를 보인다.

SK를 최첨단 기술 선단에 설 수 있도록 근간를 만든 것은 최종현 회장이다. SK그룹의 2대 회장을 맡은 최종현 회장은 사업과 기술로 나라에 보답하고 자원을 확보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겼다. 그의 절실한 애국심은 곧 지속가능한 성장과 혁신을 위한 교육 및 인재 양성에 대한 투자로 나타났다. 그 결과 현재 전세계를 호령하는 SK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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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도 인간, 둘째도 인간, 셋째도 인간이다. 기업경영에서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인간 위주의 경영이다. "

1962년 11월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경영에 합류한 후 1973년 선경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최 회장은 항상 "사람이 먼저다."라고 말했다. 그가 큰 손해를 끼친 프로젝트 브리핑을 듣고 말한 일화는 지금까지도 큰 울림을 주며 전해진다. 프로젝트 실패로 잔뜩 주눅이 든 책임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엇다. 이때 최 회장은 실수를 나무라는 대신 따뜻한 격려를 건냈다. "돈을 죽여도 사람을 죽이면 안 되지, 사람이 중요한 거야."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으로써 치명적인 프로젝트 실패를 따뜻하게 품은 일화는 최 회장이 직원을 '돈'이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며 대한 일화의 하나로 유명해졌다.

사람을 중요시한 최 회장은 취임 후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하는 등 인재양성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업적과 일화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 중에는 독특한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장학퀴즈 후원'이다.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있는 장학퀴즈는 1973년부터 1996년까지 MBC에서 진행한 TV프로그램으로, 현 지상판 최장수 퀴즈프로그램이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다. 고등학생들간의 순수 교양퀴즈 프로그램인 장학퀴즈는 최 회장의 강력한 의지로 수십년에 걸쳐 이어진 인재양성을 위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최 회장은 50대 기업에도 간신히 들던 시절 프로그램 제작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형태로 장학퀴즈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매년 두차례 그룹 본사 건물로 장원을 한 학생들을 초청해 식사하며 이야길 나눴다. 훌륭한 인재를 미리 스카웃하려는 것일까 다들 생각했지만 정작 최 회장은 어느날 식사 중 학생들에게 "너희는 졸업하고 선경에 오면 안 돼. 오지마."라고 말했다. 세계 곳곳으로 나아가 공부하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 일해달라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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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번 실패를 했다고 중단하면 아무 성과가 없다. 장기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실패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

따뜻한 마음을 품었다고 해서 기업가로서의 날카로운 판단력과 시각이 무디지도 않았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섬유 기업이었던 SK그룹의 다각화와 글로벌화로 꼽힌다. 그는 1975년 신년사를 통해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천명했다. 직물에서 시작한 선경을 에너지·종합화학기업으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세운 목표를 상황이 나쁘다고 해서 바꾸지도 않았다. 그 결과 SK는 정유, 화학, 통신, 반도체 등 다양한 분야로 다각화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 파동을 본 최 회장은 에너지 자립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1980년 대한 석유공사의 경영권을 획득한 후 그는 사업 비전을 석유정제업에서 '종합에너지기업'으로 설정하고 1983년에는 무자원산유국에 도전했다. 미국 코노코(Conoco)사와 공동으로 인도네시아 카리문 광구 석유개발에 투자했고, 우리나라 첫 자원개발 1호 기업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석유개발에 들어가던 때, 주변에서는 우려가 쏟아졌다. 수 년에 걸친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어야 하지만 성공률은 너무나 낮았다. 계속 되는 실패에 관계자들이 포기해야 한다는 고언을 쏟아냈지만 그는 "우리는 장사꾼이 아니라 인더스트리얼스트(Industrialst)"라며 유전 개발을 추진했다. 그의 고집은 곧 1984년 예멘 마리브 광구에서의 원유 발견으로 이어졌다.

최 회장의 도전은 계속 됐다. 그는 정보통신사업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이때 또 한 번 그의 놀라운 결정이 내려졌다.

선경텔레콤은 1991년 4월 설립되어 선경의 정보통신 사업 진출기반의 한 축을 구축했다. 1992년 6월 10일 대한텔레콤으로 상호를 변경 제2이동통신 사업권 획득에 참여한다. 당시 총 20만 페이지에 달하는 사업계획서를 체신부에 제출해 압도적인 차이로 최고 점수를 획득, 제2이동통신사업 최종 허가대상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큰 장벽에 부딪쳤다. "현직 대통령의 인척기업에 엄청난 이권이 걸린 사업을 허가한 것은 잘못"이라는 여론때문. 이에 당시 대한텔레콤 손길승 사장은 제2이동통신 사업권 반납을 천명했다.

최회장은 다시 한번 대승적 차원의 결단을 내렸다. 1994년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었던 그는 제2 이동통신 사업을 포기한 대신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한국 이동통신을 인수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전경련 회장을 겸하는 이상 제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경쟁이 올바르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그는 "우리는 미래를 사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한국 이동통신 입찰에 참여해 경영권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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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SK를 있게 한 최 회장은 죽음의 앞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선진 일등국가를 고민한 최 회장은 우리나라 경제가 서서히 침체 되던 1993년, 전경련 회장에 취임했다. IMF 직전 폐암 투병 상황에서도 산소통과 산소호흡기를 달고 2차례 청와대에 방문해 대통령 독대와 경제회생 방안 진언에 나서기까지 했다. 1998년 8월, 병상에 누운 채 미래를 걱정하며 정리한 유고집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그의 인생, 그의 기업가 정신은 인간, 그리고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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