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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 (화)

굿 보며 자란 박칼린 "걸음걸이만 봐도 그 사람 성격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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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스테이지] 창극 첫 도전하는 박칼린



중앙일보

국립창극단 신작 ‘만신: 페이퍼 샤먼’의 무대 모형을 소개하는 박칼린 연출. 한지와 종이접기 콘셉트의 무대다. 최기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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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에요.” 국립창극단 신작 ‘만신: 페이퍼 샤먼’(6월 26~3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쓰고 연출하는 박칼린의 말이다. ‘예민한 자’라니 무슨 뜻일까. 속된 말로 ‘점쟁이’ ‘무당’을 해외에선 ‘센서티브’ ‘힐러’ 등으로 부른다. 정신과 전문의 주디스 올로프가 쓴 『나는 초민감자입니다』에 따르면, 이들은 감정이입 능력이 지나쳐서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느낀다고 한다.

그리스 비극부터 웹툰까지, 텍스트와 소재의 경계를 넓혀온 국립창극단이 최초로 무속에 손을 댄다. 국내 뮤지컬 음악감독 1호, 국내 최초 여성 전용 19금쇼 연출가 등, ‘최초’라는 수식어와 익숙한 박칼린의 도전답다. 지난해 국립창극단에 부임한 유은선 예술감독이 기획한 첫 신작인 만큼 파격을 꾀하는 모양새다.

박칼린의 창극 도전이 놀랄 일은 아니다. 음악감독과 연출가는 물론 간혹 배우로도 변신하는 ‘전방위 아티스트’인 그는 국악과도 연이 깊다. 서울대에서 국악작곡을 전공하고 박동진 명창에게 판소리 5바탕 중에서도 가장 고난도인 ‘적벽가’를 배우기도 했다. “창극이 낯설지 않지만 이 작품을 여기서 풀어내는 게 힘드네요. 뮤지컬과는 시스템도 다르고, 단원들은 굿음악도 해야 해서 익숙한 창법과 장단을 벗어나야 하니까요.”

대학서 국악 전공, 박동진에 ‘적벽가’ 배워

영험한 힘을 지닌 소녀가 내림굿을 받아 강신무가 되어 오대륙 샤먼과 함께 각 대륙의 비극과 고통을 다양한 형태의 굿으로 치유하는 여정. ‘만신 : 페이퍼 샤먼’의 로그라인이다. 영화 ‘파묘’ 등으로 굿과 무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지금,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트렌드 같은 건 몰라요. 그저 몇 년 전부터 갖고 있던 내 이야기보따리 중 하나가 굿 소재였는데 이번에 타이밍이 맞은 거죠. 원래는 진짜 무당들과 어려운 나라들을 돌면서 달래주는 무대를 하려던 건데, 창극단에서 하게 되면서 전혀 달라졌어요. 다큐를 하려다가 아트를 하게 됐달까.”

아프리카 흑인 노예부터 미국 인디안, 아마존 원주민 부족까지 찾아가 굿을 벌이는 내용이라니 상상이 잘 안 된다. 소리꾼들이 굿음악에 도전하기도 벅찬데, 외국의 샤먼을 연기하려면 어떤 소리를 내야 할까. “오대륙이라고 갑자기 아프리카 음악을 하는 게 아니고 한마디로 말로 조집니다.(웃음) 소리꾼은 스토리텔러들이잖아요. 가사 내용에 오대륙을 담는 거죠. 더 중요한 건 어느 대륙의 샤먼이건 다 치유사란 거예요. 국립창극단에서 박칼린이란 사람이 한국 무속 얘기만 할 건 아니고, 전 세계 무속인들이 함께 더 큰 넋을 빌러 다니는 것으로 크게 보고 싶었어요. 한국이 이젠 다른 나라를 위해 빌어줄 수 있는 나라가 됐고, 그만한 힘이 생겼다면 나눠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만들고 있어요.”

애초에 박칼린은 왜 굿에 꽂힌 걸까.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모두 ‘예민한 자’로, 어려서부터 굿을 보고 자랐기에 자연스런 선택이란다. 그 자신도 어느 정도 ‘예민한 자’고, 작품의 주인공 이름 ‘실’도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이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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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만신: 페이퍼 샤먼’에는 한국 강신무와 오대륙 샤먼이 등장한다. [사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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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다 직업이 무속인이 아니라 그냥 엄청 예민한 사람들이에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걸 느끼는 분들이고, 그들의 조언을 들으면 도움이 되죠. 기운이 엄청 세서 후손들을 잘 챙겼달까. 근데 이런 얘길 하면 너무 번져서 말을 아껴야 해요.(웃음) 나도 예민한 사람이라 이 작품을 굉장히 편하게 썼다는 정도는 말할 수 있지만, 캐릭터에 나를 투영한 건 아니에요. 주인공 이름도 그저 예쁜 이름이라서 쓰기로 한 거죠.”

실제로 그는 캐스팅 오디션에서 단원들을 잠깐 보고도 개개인의 성향을 곧바로 파악해 관계자들을 놀래켰다고 한다. “노래도 듣기 전, 방에 들어오는 걸음걸이에서부터 성격이 보인다”는 게 그의 말이다. “어떻게 예민하냐고요? 나쁜 걸 잘 알아보고 안 좋은 일을 잘 피해가요. 남들보다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했던 말이 나중에 다 맞더라는 얘기를 남들로부터 듣곤 하죠.”

한 두시간 대화를 나눴지만 그는 정말 예민해 보였다. 상대방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는 법이 없었다. “굉장히 예술가 같다”고 하니 그제야 호방하게 웃는다. “예술인지 몰라도 나는 그저 무대서 사는 사람이에요. 다만 어려서부터 피아노·첼로 등 엄청난 음악교육과 발레·한국무용까지 배웠던 밑바탕이 도구가 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상상을 구현 못했을 테죠.”

“걸음걸이만 봐도 성격 보여예민한 편”

굿 소재라고 해서 ‘파묘’의 대살굿처럼 스펙터클한 장면을 기대한다면 틀렸다. 늘 굿과 친하게 지내온 그에게 굿이란 평화 그 자체다. “한국에서 무속영화를 만들면 칼 물고 돼지 잡으러 뛰어다니고 피를 묻히지만, 영화는 영화로 봐야죠. 저는 한번도 피가 나오는 굿을 본 적이 없고, 우리 굿 장면에도 그런 거 없어요. 영화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화려하게 하는 게 아니라, 두세 명이 소박한 흰 옷 입고, 정한수 한 그릇 떠놓는 정도죠. 우리 포스터를 보면 엄청 평화롭지 않나요.”

그가 굿을 들고 나온 이유기도 하고, ‘페이퍼 샤먼’이란 제목에도 그런 뜻이 깃들어 있다. “굿이라고 하면 어둠 속에서 만신이 뚝뚝 피 흘리는 장면을 연상하잖아요. 태초에 이 땅에 있던 음악이고, 다친 사람을 달래주는 치유사일 뿐이에요. 그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어둠 속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물·돌·나무가 있는 숲의 조용하고 선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게 굿이죠. 역사를 남기지만 순식간에 타 버리기도 하는 종이처럼, 한 명의 샤먼도 그렇게 야들야들해요. 모든 게 쓰여질 수 있고, 썼다가 없앨 수도 있고. 그렇게 많은 걸 대변해 주는 존재가 샤먼이거든요.”

수십 년간 공연을 하면서도 “대상과 관객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냐 물으니 “열심히 만든 걸 보러 오셨으면, 같이 즐겼으면 좋겠다”고 답한다. 무슨 뜻일까. “같이 울고 웃고 춤추면 좋을 텐데 한국 관객은 부동자세거든요. 그런 객석은 무대에 전혀 도움이 안 돼요. 굿판에 오셨으니 객석이 떠들썩했으면 해요. 뮤지컬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시끄럽게 보니까, 옆사람이 쳐다보더니 나를 알아보고 아무 말 못하더군요.(웃음) 외국에선 세트나 의상이 예뻐도 박수 치고 환호하죠. 그래야 만든 사람도 힘을 얻는데, 왜 이렇게 틀어막고 있을까요.” 공연장도 굿판처럼, 좀 시끌벅적해도 좋다는 얘기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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