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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태평로] ‘붉은 여왕 효과’에 흔들리는 한국 여자 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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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밥 먹듯 세계 호령하다

다른 나라 맹렬한 성장 추격에

경쟁력 저하 부진의 늪 허덕

전보다 2배 더 노력해야 발전

조선일보

도널드 트럼프(빨간 원) 미 대통령이 경기를 마치고 걸어나가는 박성현을 내려다보며 박수를 보내는 모습. /USA투데이스포츠 연합뉴스


2017년 11월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한국 국회 연설 도중 “한국 (여자)골프는 세계 최고 기량을 갖고 있다”면서 한 선수를 거론했다. 그녀는 박성현. 그해 24세 나이에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무대에 데뷔, 메이저 대회 US여자오픈을 제패한 신데렐라였다. 사실 그 대회가 자기 골프장(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열린 점을 슬쩍 홍보하려는 속셈이었다는 야유도 있었지만 여하간 한국 여자 골프 위상은 대단했다. 박성현은 LPGA 신인상과 올해의 선수상을 동시에 거머쥐면서 단숨에 세계 1위까지 치달았다.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승승장구하던 그녀는 2020년부터 내리막을 걸어 올해는 333위에 머물고 있다.

박성현은 부진의 늪에 빠진 한국 여자 골프 현주소를 극적으로 알려주는 좌표 중 하나다. LPGA 투어 대회에서 한국 여자 선수들은 지난해 5승(5회 우승)에 그쳤다. 그 전해는 4승. 2015·2017·2019년 각각 15승을 올리며 트럼프가 칭송할 정도였던 시절과 비교하면 안타깝다. 이보다 더 나빴던 적(2000년 2승, 2011년 3승)도 있었지만 그땐 곧바로 반등했다. 올해도 14번째 대회가 끝날 때까지 우승 소식이 없다. 역대 둘째로 긴 가뭄이다. 3년 연속 늪에서 허우적대는 느낌이다.

이유가 뭘까. 강형모 대한골프협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선수들은 여전히 잘해요. 문제는 다른 나라 선수들이 더 잘하게 됐다는 거죠.” 이른바 ‘붉은 여왕 효과(Red Queen Effect)’로 통하는 그 질곡에 빠졌다는 얘기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개념. 붉은 여왕이 사는 곳에서는 제자리에 멈춰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뒤로 처진다. 현상이라도 유지하려면 쉴 새 없이 달려야 하고 좀 더 앞으로 나가려면 2배 빨리 달려야 한다.

LPGA 대회 전체 상금 규모는 올해 1억2400만달러(약 1716억원). 지난 10년간 2배 이상 늘었다. US여자오픈만 해도 박성현은 7년 전 우승 상금으로 90만달러를 챙겼는데 이번에 정상에 오른 유카 사소는 240만달러를 받았다. 세계 각국에서 이 커진 시장을 노리고 재능 있는 여자 선수들이 더 많이 뛰어들고 있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 일본·태국·중국 등 각축전은 유례없이 치열하다. 미국에서 18세 이하 청소년 여자 골프 인구는 지난해 역대 최다 수준으로 증가했다. 이전과 같은 강도로 노력해서는 비슷한 지위를 누릴 수 없는 구조다.

한국 여자 골프 인기는 남자를 능가한다. 올해 국내 여자 대회 30개 총상금 규모는 320억원. 10년 전보다 역시 2배 이상 늘었다. 역설적으로 이 커진 주머니가 선수들 도전정신을 약화시킨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역만리에서 눈물 젖은 햄버거 씹지 않아도 고향에서 ‘소확행(小確幸)’을 누릴 수 있는데 굳이 모험할 필요 있냐는 타령이다. 여기에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도 재를 뿌렸다. 한동안 국내 대회를 보호한다는 취지로 선수들 해외 대회 출전 한도를 1년 3회로 제한했다. 지난해 지적을 받곤 뒤늦게 없앴다. 그래도 아직 국내 주요 대회가 열릴 때는 해외에 못 나가게 한다. 좀 시대착오적이다.

올해 LPGA 10년 차로 접어드는 김효주(29)는 수년 전부터 근력 운동에 진심이라고 한다. 세계 최고 무대에서 살아남으려면 파워(힘)를 더 길러야 한다는 걸 깨달아서다. 매일 뭔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퇴보하기 마련이란 교훈을 실천한다. 2022~2023년 2년 연속 LPGA 평균 타수 2위를 기록한 저력이다. 김효주 같은 선수가 더 많아져야 한다. 그럴 때 한국 여자 골프 전성기는 다시 올 것이다.

[이위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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