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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정기종 칼럼] 자유와 풍요의 나라 레바논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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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6월 18일자 외신은 이스라엘군이 레바논에 대한 대규모 공격작전계획을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로서는 이 기회에 헤즈볼라와 배후 지원국 이란에 강한 경고를 보내려는 것이다. 북방전선을 확대함으로써 가자전투에 쏠린 국제사회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정착촌 확대나 사해자원 개발과 같은 실리적 안건을 로키(low-key)로 진행할 수 있다는 계산도 있을 것이다.

레바논은 중동의 스위스 또는 파리로 불릴 만큼 풍요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어서 과거에 베이루트의 해변 요트장과 스키장 그리고 카지노 클럽은 아랍과 유럽 부호들이 선망하는 휴양지였다. 레바논의 어원(Laban, Milk)처럼 우윳빛과 같은 해발 2000m가 넘는 레바논 산맥에 쌓인 눈과 삼나무 숲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이 실감 나게 한다. 베카계곡은 로마의 식량창고로 불렸고 크사라와 케프라야 두 포도원의 와인은 최고등급의 평가를 받는다.

전통적으로 대통령은 기독교, 국무총리는 수니파 이슬람 그리고 국회의장은 시아파 이슬람이 맡고 있고 17개 정파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향유하는 민주사회다. 레바논은 근대 아랍의 민족주의와 문예부흥을 견인했고 대통령을 비롯한 유력인사들이 졸업한 브루마나 고등학교 교가에는 코스모폴리탄적인 자유로움과 진취성이 나타난다. "세계를 여행하다 호주의 해변에서 옛 친구를 만났네. 자네 부루마나 출신 아닌가, 모교의 풍경은 그대론가, 그때 그 친구들도"라는 가사처럼 국제화된 감각이 있다.

근대 이후 1970년대 초까지 중동의 금융과 관광문화 산업의 중심역할을 했던 레바논은 이후 급락해 지금과 같은 어려운 처지의 나라가 되었다. 1975년부터 1989년까지 계속된 내전 중에는 시리아군과 이스라엘군에 의해 수도 베이루트가 점령당했고 이들 외국군은 2000년대 초에야 철군했다.

레바논의 위기는 장기간 축적된 내우외환의 결과며 상황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위기의 시그널이 계속 울렸지만 군사와 외교에서의 안보 이니셔티브를 거의 발휘하지 못한 채 피동적으로 투키디데스의 함정으로 끌려갔다. 1948년 제1차 중동전을 위시로 수차례 발생한 팔레스타인 전쟁난민 수십만 명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용했다. 이들은 경기도 면적 정도의 좁은 레바논 국토 내에 10여 개의 난민촌을 건설해 무장민병대를 조직했고 국가 안에 별도의 국가를 형성했다.

1975년 4월 레바논 기독교 팔랑기스트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난민버스를 공격하면서 내전이 촉발되었다. 전투는 레바논의 기독교 세력을 상대로 이슬람 세력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가 연대해 싸우는 양상이 되었고 이십대의 젊은 여성 시게노부 후사코가 지휘하는 일본적군파까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에 합류했다.

1976년 사르키스 레바논 대통령의 요청으로 아랍연맹이 파병한 시리아·아랍잠정군이 참전하고 뒤를 이어 이스라엘군도 참전하면서 레바논 내전은 국제전이 되었다.

1982년 6월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전면적으로 침공해 시리아군을 축출하고 수도 베이루트를 점령했다. 그리고 9월에는 이스라엘군의 비호 아래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가 사브라와 샤틸라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외교단 피해도 발생해 베이루트 주재 미국대사관은 1976년 6월에 대사가 테러로 사망했고 1983년 4월에 또다시 대사가 테러로 사망했다. 지역안정을 위해 미국이 파병한 해병여단은 1983년 10월 이슬람 민병대의 자폭테러로 해병 241명의 사망자를 낸 후 철수했다. 한국대사관도 서기관 한 명이 1986년 1월부터 1987년 10월까지 22개월간 이슬람 무장단체에 납치되어 감금당한 후에 석방되었다.

장기간 지속된 내전으로 레바논 경제는 재기의 기회를 상실했고 레바논의 영화는 과거가 되었다. 마치 "신은 레바논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주셨다. 다만 좋은 이웃나라만 빼놓고"라는 레바논 속담과 같이 되었다. 내전은 1989년 9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재로 레바논 여러 정파들이 합의해 타이프 협정을 체결해 종식되었다. 400만의 인구 중 약 17만명의 사망자와 20만명의 부상자 그리고 이재민 80만명이 발생했고 40만명가량이 해외로 이주해 산업과 금융을 붕괴시켰다.

내전이 종료된 후에도 레바논의 정세는 불안정했다. 헤즈볼라의 알마나라(등대), 기독교 정파의 누르(빛)와 엘비시아이(LBCI), 이슬람 정파의 무스타크발(미래)과 같이 여러 정파가 소유한 방송언론은 정치화해 과도한 선전전으로 선동적인 언어폭력을 구사했고 정치인 테러로 연결되었다. 2002년에는 팔레스타인 난민촌 학살당시 기독교 민병대장이었던 엘리 호베이카가 폭탄테러로 사망하고 국영방송 텔레 리반 언론인을 비롯해 유명인사 피살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그리고 남부레바논에서는 간헐적으로 전투가 계속되었다. 헤르몬산에서 발원한 수자원을 둘러싼 레바논과 시리아, 이스라엘 간의 영토확정이 미해결 상태이기 때문이다. 국경에는 한국군도 참여한 유엔레바논잠정군(UNIFIL)이 배치되었으나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만큼 충분한 병력과 장비규모는 아니다.

레바논이 위기관리에 실패한 이유는 국력이 불충분하고 단결과 화합의 리더십을 발휘하기에는 국가의 기본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옥스퍼드대학 인류학 교수 피터 터친은 역사동역학(Cliodynamics)에 입각해 《전쟁과 평화 그리고 전쟁》을 쓰면서 강대한 세력에 접한 변방국가의 생존법을 분석했다. 터친은 민족국가의 단층선에서 압력을 받으면서 응집력이 약한 민족은 부서지거나 흡수되고 강한 결속력에 기반을 둔 민족은 생존하고 팽창한다고 정의했다.

터친은 14세기 아랍 사상가 이븐 칼둔이 사용한 아사비아(Asabiya)라는 용어를 소환했다. 아사비아는 사회집단의 응집된 행동력을 말하고 이러한 역동적 질량은 시대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그리고 아사비아가 높은 집단은 초민족국경(metaethnic frontier)을 이용해 역량을 강화한다고 설명했다. 민족집단 간의 알력이 오히려 저항하고 성장하려는 열망이 되어 단결된 아사비아를 배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국력의 열세와 지정학적 불리함을 극복하게 된다는 것으로 유사한 처지에 있는 레바논에도 이 같은 역사법칙이 적용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시간이 알려줄 것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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