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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딱딱하고 강해지는 한국어 [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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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577돌 한글날인 지난해 10월9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립 한글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이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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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최근 서울의 1970~1980년대 영상을 보게 되었다. 옛 모습도 흥미로웠지만 말의 변화가 매우 크다는 점에 새삼 놀랐다. 영상 속 서울 사람들 말투는 억양이 비교적 평탄하고 부드러운 것이 인상적이었다. 내 기억에 그때만 해도 서울 시민들 가운데는 지역 출신들이 많았고, 따라서 표준어와 여러 지역 방언이 동시에 들리는 경우가 많았다. 정제된 표준어에 맞춰 촬영한 영상과 오늘날을 단순 비교하는 건 적절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뚜렷한 변화들은 흥미로웠다.



가장 큰 변화는 모음이 대체로 짧아졌다는 점이다. 특히 젊은 사람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짧은 모음과 장음이 많이 들린다. 강조할 때나 문장 끝에 모음이 오는 경우 길어지기도 하지만 단어 사이 모음은 확실히 매우 짧아졌다. 장음을 주로 사용하고, 속도가 빨라지면서 덩달아 말이 빨라져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장음이 몇 개씩 나란히 있는 경우가 많은 영어나 독일어 같은 게르만어를 멀리서 들으면 딱딱하고 강한 느낌을 받곤 하는데 한국어 역시 ‘장음화’하다 보니 예전에 비해 딱딱하고 강하게 들린다.



된소리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빠질 수 없다. ‘자장면’ 표기 논쟁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짜장면’으로 발음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꽤 오랫동안 ‘자장면’만 표준어 표기로 인정했다. 지난 2011년 국립국어원이 둘 다 표준어 표기로 인정한 뒤 이제는 대부분 ‘짜장면’으로 쓰고 있다. 이와 비슷한, 된소리 증가 사례는 많다. 2000년대 이후 ‘선생님’을 ‘샘’으로 줄여 부르더니 언젠가부터는 ‘쌤’이 되었다. 텍스트 기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세계 안에서도 된소리 사용은 부쩍 늘어났다. 사용 빈도가 그리 높지 않아 텍스트에서 사용하면 직관적으로 어감의 세기를 드러내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연결 어미의 톤이 급격하게 올라가는 것도 들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고’이다. 특히 뭔가를 설명할 때, 모음은 짧게, 톤은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식의 말투가 어미나 한 문장 안에 두세 번 연달아 나오면 문장 톤의 고저가 마치 높은 파도가 있는 것처럼 매우 두드러지게 들린다. ‘~하고’를 예로 들면 ‘하’를 길게 발음할 때 억양은 비교적 덜 올라가지만, 문장 안에서 독특한 파도가 일어나는 것처럼 들려, 40여 년 전의 평탄한 억양과는 매우 큰 변화가 느껴진다.



언어 변화는 매우 천천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쉽게 느끼기도 어렵고 그 원인을 분석하기도 어렵다. 사회언어학의 고전적 이론에 따르면 상류층에서 시작한 말의 유행은 이른바 위에서 아래로 퍼져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간다고 한다. 이에 비해 일반 대중, 특히 젊은 세대 안에서 시작한 말의 유행은 옆으로 퍼진 뒤 위로 향하곤 한다. 이런 이론의 핵심은 특정 사회 계층이 특징적인 말을 사용함으로써 차별성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다른 계층 또는 다른 사회와의 거리를 만들어냄으로써 내부 연대감을 강화한다는 데 있다. 이른바 상류층은 우월한 위치를 드러내고, 서민들은 심리적 단결을 꾀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불과 40여 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이처럼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왜일까. 에스엔에스와 새로운 인터넷 매체를 주로 소비하는 젊은 층으로부터 나온 것은 확실하다. 이들 사이에 유행은 대면과 비대면의 소통에서 시작하고 여러 수단을 통해 빠른 속도로 보급된다. 이러한 유행이 젊은 세대 안에서 정착된 뒤 점차 위아래 세대로 영향을 미치면서 사회 전반의 언어 변화를 견인한다. 그렇게 보면 윗세대들은 ‘젊어 보이기’ 위해 젊은 세대의 말투를 무조건 따라 한다기보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새로운 언어 유행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언어에 변화를 준다. 그렇게 차츰 변화해온 것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낸 셈이다. 이를 두고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대 흐름에 맞춰 변화하는 언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또 자연스러운 언중의 태도이기도 하니 그러하다. 다만 영상 속 그 시절 그때의 서울의 말씨를 다시 듣기 어려워졌다 생각하니 그리운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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