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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 (목)

이슈 정치계 막말과 단식

아웅산 테러 후 남북 첫 대면서 삐라·성냥갑 던지고 욕설 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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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남북회담문서 공개

"부자세습 공산권에서도 비웃음거리" 직격에 北 반발하며 난장판

북한, 80년대까지 어선 461척 납북···457명은 아직 못 돌아와

서울경제


버마 아웅산 테러 후 처음 남북이 마주 앉은 회담장의 험악한 분위기와 분단 후 첫 이산가족 고향 방문을 성사하기 위한 끈질긴 협상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남북회담 사료가 공개됐다. 6·25전쟁 후 북한의 우리 어선 납북이 얼마나 빈번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도 수록됐다.

통일부는 1981년 1월부터 1987년 5월까지 인도주의 협력과 체육분야 남북회담문서 1693쪽을 2일 일반에 공개했다. 2022~2023년 총 네 차례에 이어 이번이 다섯번째 남북회담문서 공개다.

북측은 1980년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대표 접촉이 성과 없이 끝난 후 남측의 대화 제의를 줄곧 거부하다가 1983년 아웅산 폭탄 테러 3개월 후 북·미와 한국이 참여하는 3자 회담을 들고나왔고, 이듬해 두 달밖에 남지 않은 LA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논의하자고 돌연 제의했다.

??84년 4월 어렵게 복원된 회담에서 의제 논의는 뒷전에 밀린 채 아웅산 폭발 테러와 영화인 신상옥·최은희 납치사건을 두고 고성과 욕설이 오갔다. 남측 대표는 첫 발언에서부터 먼저 아웅산 테러에 대해 시인·사과하라고 북측에 요구했다. 그러나 북측은 아웅산 테러가 남측의 “자작극에 불과하다”고 적반하장으로 맞섰다. 북측은 제1·3차 체육회담에 앞서 남측이 판문점 일대에 ‘삐라’(대북 전단)를 뿌리는 ‘도발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며 남측을 비난하기도 했다. 북측 대표는 “이게 뭐야, 이게! 이거 보라!”라고 외치며, 챙겨온 전단을 남측 대표를 향해 냅다 던졌고, 남측 대표는 지지 않고 “누구한테 무례한 짓을 하고 있어!”라며 전단을 되던졌다.

남측 대표는 더 나아가 “귀측의 부자세습왕조 구축과 우상화는 자유세계는 물론 심지어 공산권 내부에서까지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고 직격했다. 남북회담장에서 남측 대표가 세습을 대놓고 비판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이에 북한은 대표단뿐 아니라 취재진까지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성과 욕설을 쏟아내며 회담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회담문서에는 “심지어 북한측 대표들은 우리측 대표가 발언하는 도중에 우리측 대표에게 성냥갑을 던졌”다며 “북한기자들까지 합세해 기물로 책상을 계속 두드리고 우리측 대표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기록됐다. 세 차례 회담 내내 팽팽한 대치만 이어진 남북 체육회담은 북한이 다른 공산권국가의 LA올림픽 보이콧 결정에 합류하면서 아무런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

1984년 9월 8일 북한적십자는 남한 수재민에게 물자 지원을 제의하고 나섰다. 국내외 예상과 달리 엿새 만에 한국적십자는 수락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국제적십자연맹의 구호물자 지원 제의도 이미 사양한 데다 북한의 의도가 불분명해 수용하지 않을 것으로 국내외에서 예상됐다. 남북회담사료에는 정부는 처음에는 북한의 제의를 거절하기로 잠정 결정했다가 며칠 만에 이를 뒤집었다는 내용이 실렸다. 상세한 수락 경위를 기록한 대목이 부분 비공개 처리됐으나 일부 공개된 내용을 보면 북한적십자사의 제의 이튿날 남북대화사무국에서 청와대, 총리실, 국가안전기획부, 외무부, 보건사회부, 문화공보부, 국토통일원, 대한적십자사 등 관계부처 실무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 결과 한적 대변인 논평 형식으로 북측 제의를 거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수재물자 수용 결정은 끊어졌던 남북 직통전화 재가동으로 이어졌다. 4년만에 연결된 남북 직통전화는 2008년 8월까지 단절 없이 가동됐다.

한편 남북회담사료집에 실린 어선 납북 및 송환 통계 자료를 보면 북한은 6·25전쟁 후부터 1987년 5월까지 우리 어선 459척을 납북했다. 끌려간 승선원은 3651명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427척·3232명은 송환됐으나 32척 419명은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미송환자 중 침몰 등에 따른 사망·실종자를 제외하고 북한에 억류된 인원은 총 27건 403명으로 사료집에 기재됐다. 1987년 이후에도 태양호(1989.1)와 명성2호(1989.5)가 1980년대 납북됐다. 1980년대까지 총 461척의 어선이 납북된 것이다. 통일부에 따르면 어선 납북에 따른 미귀환자는 작년 말 기준으로 457명이다.

우영탁 기자 ta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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