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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 (금)

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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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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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 철학자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은 18세기 후반 세번에 걸친 항해로 대서양에서 남태평양을 거쳐 베링해협으로 이어지는 항로를 개척했다. 세번째 항해 중이던 1779년 쿡은 하와이 해변에서 원주민과의 충돌로 생을 마감했다. 나머지 선원들은 이듬해 영국으로 돌아오면서 지리학적 지식과 탐험 지역의 다양한 물품들은 물론, 쿡의 항해일지에 적혀 있던 ‘낯선’ 단어들도 함께 가져왔다. 그 가운데 특별히 주목받았던 말이 터부(taboo)다.



폴리네시아와 멜라네시아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지역에 따라, 타부, 카푸, 타푸 등으로 발음된다. 쿡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의례는 ‘탕가타 타부’라고 불리고, 특정 음식을 금하거나 특정 물건 사용을 금지하는 것도 타부라고 불리며, 왕은 타부에 둘러싸여 있다”고 기록했듯이, 그 말은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신성한’ 또는 ‘성스러운’ 그래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엇’이라는 뜻과 함께 ‘위험한’ ‘두려운’ ‘금지된’ ‘말해서는 안 되는 것’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터부는 서구에 도입되면서 특별한 관심을 끌게 되었고 철자만 조금씩 변형되어 여러 언어에 흡수되었다. 나아가 19세기 내내 여러 학술 분야에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되었다. 이는 곧 다양한 문화권에서 터부 개념에 포섭될 만한 현상들이 이미 있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일부 언어학자들은 터부라는 말이 들어오기 이전 서구 사회는 일종의 ‘어휘 결핍’ 상태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해석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그 말이 들어오기 전에도 서구 사회에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신성’이나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만지지도 말라’는 금기의 언어들이 있었다. 이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도 마찬가지다. 터부가 이미 국제어로 자리잡았지만, 우리말로는 금기라고 옮겨도 그 의미를 크게 손상하지 않는다. 금기 역시 복합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자어 ‘금’(禁)은 보일 시(示)와 수풀 림(林)이 결합한 글자다. 시(示)는 제단을 본뜬 것으로 신성 또는 귀신과 연관되며 숲속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었다.



쿡을 비롯한 탐험가들이 그들 입장에서 ‘미지의 세계’를 경험할 때 맞닥뜨리게 되는 문화충격은 언어의 의미를 증폭시킨다. 그들은 사실 그곳에서 오랜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타자의 얼굴’로만 착각했을 뿐이다. 실제로 다양한 공동체에 존재하는 금기 현상들은 그 구성원들에게 워낙 익숙해서 특별히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18세기 말 이후 서구에서 터부 개념이 관심을 끌고 학술적으로 활성화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그 이전에는 이런 현상에 대해 ‘의식 결핍’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수많은 금기의 의미와 그것의 사회적 효용성 또는 폐해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식해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터부는 ‘계기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문명화 과정을 폭넓은 시각으로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터부는 인간 문화의 보편적 원리일 수 있지만, 그것이 가져온 문화충격 효과는 서구인들에게 우선적으로 특별한 터부 현상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그 개념을 적용한 연구도 뭔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당기는 주제에 집중했다. 섹스, 근친상간, 피, 출산, 죽음 등이 그렇다. 이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연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관심은 온통 ‘근친상간 금기와 파기에 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인류문명 형성의 가장 강력한 동력임을 증명하는 데에 있었다. 터부 개념에 관한 연구의 고전이 된 저작 ‘토템과 터부’에서 그는 이렇게 환원주의적 결론을 내린다. “나는 종교, 윤리, 사회, 예술의 시초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집중되어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인간진화생물학과 문화신경과학을 비롯한 최근의 연구 성과는 근친상간 금기가 가족보다는 ‘가깝지 않은 친척들 사이의 성관계와 짝 결속’을 규제하기 위해 문화적으로 진화한 사회규범이라는 가설을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가족 내 근친상간 금기에 관한 담론은 여전히 세인을 유혹하는 주제다. 마치 터부가 금기이자 동시에 유혹이듯이.



좀 과장하면 터부를 화두 삼아 백만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음식 금기, 언어 금기, 권력자의 금기 등등 매우 다양한 금기 현상을 다학제 간 연구 차원에서 논할 수 있다. 나아가 터부라는 계기의 언어를 통해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사실 금기의 역사는 태초에 시작되었다. 기독교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악과에 대한 ‘이유 없는 금기’를 비롯해 고대 신화에 다양하게 변주되어 등장하는 원초적 금기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한계’를 인식하고 행동해야 하는 인간 조건을 암시한다. 일상의 구체적 금기 이전에 한계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 자유에 대한 시험이자 비극적 함정이기도 했다.



제임스 쿡은 이른바 대항해시대의 대미를 장식한 인물이다. 그의 항해를 전후해서 지구의 거의 모든 지역이 서구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탐험의 시대는 막을 내리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시대가 본격 전개되었다. 그에 따라온 것은 자원 탐사, 산업 생산,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확산이다. 이에는 어떤 한계도 없을 것 같았다. 한계를 무시한 성장과 발전의 시대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지난 3세기 동안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러나 할 수 있다고 다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자연을 이용할 수 있다고 다 이용해야 하는 건 아니다. 파낼 수 있는 자원이라고 해서 모두 파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터부라는 말이 준 계기를 지혜롭게 활용한다면, 이제 인류 스스로 지구 자연을 성스럽게 대할 줄 아는 ‘자율적 금기’를 진지하게 실천해야 할 때다.



프로이트는 “독일어 합성어 ‘하일리거 쇼이’(heilige Scheu), 곧 ‘성스러운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뜻을 지닌 말이 터부의 의미와 어느 정도 일치할지 모른다”고 했는데 동감한다. 우리는 어떤 한계도 없이 무작정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는 인류와 그 삶의 터전인 지구를 성스러운 부끄러움을 갖고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당신의 족쇄 풀린 자유는 더 큰 자유의 족쇄가 된다”는 칼릴 지브란의 예언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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