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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 (월)

급진좌파 노선 수술, 기업 강조... 英 스타머 실용주의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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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압승… 노동당은 어떻게 부활했나

조선일보

영국 조기 총선이 치러진 5일 찰스 3세(오른쪽) 영국 국왕이 버킹엄궁에서 노동당 키어 스타머 대표를 접견하고 있다. 찰스 3세는 이날 총선에서 승리한 스타머 대표를 신임 총리에 임명했다./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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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전역에서 4일 치러진 조기 총선 결과 5일 오후 2시 30분(한국 시각 오후 10시 30분) 현재 영국 노동당이 650개 의석 중 총 3분의 2에 육박하는 최소 412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노동당 역사상 1997년 이후 둘째로 많은 의석수다. 리시 수낙(44) 총리가 이끈 집권 보수당은 121석을 차지하는 데 그치면서 역대 최악의 참패를 했다. 이로써 영국엔 2010년 이후 약 14년간 총리 다섯 명이 집권한 보수당이 물러나고 노동당 정권이 들어서게 됐다.

찰스 3세 국왕은 이날 바로 키어 스타머(62) 노동당 대표를 버킹엄궁으로 불러 내각 구성을 요청하고, 새 총리로 임명했다. 스타머 대표는 앞서 개표 중 노동당 의석수가 과반 기준(326석)을 넘어 집권이 확정되자 “지난 4년 반 동안 당을 혁신하기 위해 기울인 우리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영국의 변화가 이제 시작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중도 좌파로 분류되는 영국 노동당의 대승은 좌파 및 중도가 쇠퇴하고 보수 우파 혹은 극우 성향 정권이 잇따라 들어서는 유럽 여타 국가들과 다른 방향이다. 영국 언론들은 “보수당이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코로나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과 불법 이민 급증 등 여러 정치·경제적 고비에서 제대로 된 통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 결과 영국 경제와 민생을 위기에 몰아넣었다”라고 진단했다.

2019년 총선에서 2차 대전 이후 최소 의석으로 참패했던 노동당은 2020년 스타머 대표가 당권을 쥐고 나서 이념 정당의 모습을 탈피하고 실용적 중도 좌파로 변신하며 집권을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해왔다. 미국 뉴욕타임스와 영국 이코노미스트 등은 “스타머는 보수당의 연이은 실정(失政)을 기회로 삼아 노동당을 선거에 이기는 정당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정치가보다 행정가의 모습으로 무자비하게 효율성을 높였고, 이러한 스타머리즘(Starmerism)이 노동당을 권좌로 이끌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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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패배한 보수당의 리시 수낙(오른쪽) 전 총리가 배우자인 악샤타 무르티와 함께 런던의 총리 관저를 나오고 있다. 수낙은 이날 총선 최종 결과가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전에 찰스 3세 국왕에게 사의를 표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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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국 총선은 리시 수낙 총리가 지난 5월 22일 영국 하원 해산을 전격 선언하면서 당초 예상됐던 11~12월보다 4개월 앞선 조기 총선의 형태로 치러졌다. 수낙은 보수당 지지율이 역대 최저인 20% 수준으로 바닥을 치는 상황에 시간을 끌어봐야 더 불리해질 것으로 판단하고 ‘승부수’를 던졌지만 결국 실패했다. 노동당의 3분의 1도 안 되는 의석을 간신히 확보한 보수당은 1834년 보수당 창당 이래 최악(의석수 기준)의 성적표를 받아들게 됐다.

반면 지난 14년 동안 네 차례나 보수당에 연패했던 노동당은 그간의 굴욕을 한 번에 날리는 대승을 거뒀다. 412석은 단독 집권을 위한 최소 과반 의석(326석)보다 86석이나 많다. 노동당은 이를 바탕으로 의회를 완전히 장악하고 당분간 흔들림 없는 ‘노동당식’ 정책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됐다. 영국 주요 매체들은 “노동당의 성공은 상당 부분 보수당의 무능에 의한 것도 있지만, 스타머 대표가 지난 4년여간 보여온 당내 개혁과 점진적 실용주의로 대표되는 스타머리즘의 결과”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인권 변호사로 시작, 검찰 수장을 지낸 법조인 출신 스타머는 50대인 2015년에서야 정계에 입문했고 5년 후 노동당 당대표에 올랐다. 그가 물려받은 당시의 노동당은 이번 선거에서 대패한 보수당에 견줄 만큼 ‘초토화’ 상태였다. 스타머의 전임자 제러미 코빈은 노동당 역사상 가장 좌파적인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코빈은 철도·우편·에너지 등 주요 공공 서비스의 재(再)국유화, 부유세·법인세 대폭 인상, 무상 교육 확대 등 급진적이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 당내에선 코빈의 편에 선 극좌파와 중도파 사이의 극심한 분열이 발생했다.

여기에 코빈을 비롯한 노동당 인사들의 반(反)유대주의 논란은 지지율을 더 끌어내렸다. 코빈 전 대표는 공개적인 팔레스타인 지지자로 반유대주의 단체와 연관됐다는 의심을 반복적으로 받았다. 이런 와중에 2016년 노동당 소속 켄 리빙스턴 전 런던 시장이 “히틀러도 초기엔 시온주의자(유대 국가 건설주의자)였다”는 발언을 하고, 일부 노동당원의 유대인 비방 발언과 반유대주의적 소셜미디어 게시물이 확인되면서 노동당 전체가 반유대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논란이 확산했다. 이는 2019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202석으로 참패를 겪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코노미스트는 “과거 노동당은 선거보다는 당내 문제 수습에 더 큰 공을 들여야 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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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미 코빈 전 노동당 대표가 2019년 3월 13일 영국 하원의 브렉시트 표결 이후 발언하는 모습. 코빈은 지나치게 과격한 좌파적 정책과 반(反)유대주의 발언 논란 등으로 비난을 받았다.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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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2선 의원이 된 스타머가 무너진 노동당을 되살릴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당대표 취임 직후 ‘조용한 수술’에 나섰다. 이코노미스트는 “스타머는 거창한 성명을 발표하고 이를 밀어붙이는 것이 아닌, 문제를 하나씩 찾아 조율해가는 식으로 당의 문제를 차근차근 고쳐나갔다. 의뢰인의 문제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변호사 출신다운 대처법이라는 평가도 있다”고 전했다.

스타머는 일단 2020년 10월 코빈 전 대표를 징계위에 회부해 출당 조치를 했다. 또 영국 평등인권위원회(EHRC)의 권고에 따라 당의 징계 시스템을 독립적이고 투명하게 개선했다. 동료에 대한 온정주의가 개입할 여지를 없애 차별과 혐오 발언, 부적절한 행위 등 각종 일탈 행위에 대해 엄격한 징계를 내릴 수 있게 한 것이다. 노동당이 반유대주의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에 대한 공개 사과를 하면서 재발 방지도 약속했다.

지나치게 좌경화해 공감을 얻지 못한 당의 노선 또한 적극적으로 수정해 중도에 가깝게 이끌었다. 대규모 공공 지출이 필요한 국유화 정책 대신 ‘공공 서비스 개선을 위한 지속적 투자와 현대화’를 앞세웠다. 또 ‘노동조합의 권리 강화’라는 당론을 ‘노동자 권리 보호’로 온건화했고, 고용 안정을 위한 여러 대책을 제안하면서도 “기업 활동을 과하게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는 방침을 세웠다. 복지 정책에 있어서도 코빈 전 대표의 무상 교육, 무상 의료 주장을 “재정적 지속 가능성을 고려해 복지 혜택을 지속적으로 확대해나가자”는 입장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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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어 스타머 영국 노동당 대표(왼쪽)가 5일 런던 캠든 카운슬 개표소에서 배우자인 빅토리아 여사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노동당의 총선 압승으로 14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끈 스타머 대표는 이날 총리에 취임했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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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머의 개인적 면모 또한 수낙으로 대표되는 보수당 지도층의 ‘콧대 높은 엘리트’ 이미지와 대조되며 인기를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많다. 스타머는 1962년 런던에서 공구 제작자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서민 가정 출신이다. 의사·약사 부모 사이에 태어나 인도의 억만장자 딸과 결혼한 ‘갑부’ 수낙과 상반된다. 스타머는 리즈대·옥스퍼드대를 나와 인권 변호사로 일하다 2008~2013년엔 잉글랜드·웨일스를 관할하는 왕립검찰청 청장을 지냈다. 이때의 공로로 2014년 당시 찰스 왕세자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아 영국에선 ‘키어 경(Sir Keir)’이라고 불린다. 부모 모두 노동당 지지자였고, 스타머의 이름 또한 초대 노동당 의원인 키어 하디로부터 따왔다. 2015년 53세의 나이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면서 비교적 늦게 정치에 입문했지만, 무너졌던 노동당을 노련하게 재건하며 지난 20여 년 새 가장 강력한 여당을 이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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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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