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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푸틴, ‘ABM 공동성명’ 으로 한미관계 농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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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15회>]

부시, NMD 위해 탄도탄미사일조약 파기하려는 데

한러정상회담 성명에 ‘ABM 보존과 강화’ 명시

NYT “DJ가 한미 정상회담 앞두고 러시아 편들었다”

파문확산 돼 장·차관 잇달아 교체 ...”러시아에 당했다”

[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비사를 전해드립니다.]

◇ 청와대 담당 선배 기자 “한러 공동성명에 민감한 내용 있는 것 같다”

2001년 2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방한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외교적인 측면에서 복기가 필요한 사안입니다. 지난주에 전해 드린 것처럼 푸틴은 당시 국회에서 ‘주한미군 철수’ 연설을 하려 한 것은 물론, 한미 관계를 뒤흔드는 공동성명을 주장해 관철함으로써 대한민국 외교부의 장·차관이 잇따라 물러나도록 했습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우리나라 외교사에서 어떤 나라와의 정상회담 공동성명이 문제가 돼 외교부 장·차관이 교체된 것은 푸틴의 2001년 방한 때가 유일해 “러시아에 당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전대미문의 외교 참사는 2001년 2월 27일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푸틴의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 표면화됐습니다.

조선일보

2001년 2월 27일 방한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양국 국기를 흔드는 어린이들을 향해 웃고 있다. /e영상역사관 캡처


그날 오후 3시쯤 외교부를 담당하고 있던 저는 청와대를 출입하던 김민배 선배(조선일보 정치부장·부국장, TV조선 보도본부장·대표 역임·작고)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름의 마지막 글자인 ‘배(培)’에서 유래한 ‘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선배입니다. 게쉬타포가 비밀 지령 내리듯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중요한 지시를 하곤 했습니다. 이날도 특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러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민감한 부분이 있는 것 같으니 알아보라.” 같은 시각, 다른 언론사의 외교부 출입기자들도 소속사로부터 비슷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한·러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공동성명을 급히 살펴보니 상당히 길었습니다. A4용지 9장 분량으로 다른 정상회담 성명보다 훨씬 더 길었는데, 국제문제가 언급된 5항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대한민국은 지난 1972년 체결된 탄도탄요격미사일(ABM)조약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며, 핵무기 감축 및 비확산에 대한 국제적 노력의 중요한 기반이라는데 동의하였다. 양측은 ABM 조약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가운데 전략무기 감축협정 Ⅱ(START Ⅱ)의 조기 발효와 완전한 이행, 그리고 START Ⅲ의 조속한 체결을 희망하였다.”

저를 비롯한 일부 외교부 출입기자들은 이 문구가 한 달 전 출범한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가 추진하려는 국가미사일방어(NMD) 체제를 반대하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2001년 1월 출범한 부시 행정부는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스타일의 외교안보정책을 수립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북한, 이라크, 이란의 미사일 공격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NMD체제를 강력히 추진할 태세였습니다. 이를 위해 요격미사일 개수 등을 제한한 ABM조약의 개정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다음해 1월 이라크·이란·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명합니다.)

3시 30분쯤 한러 정상회담 공동성명을 브리핑하기 위해 외교부 당국자(구주국 심의관)가 기자실을 찾아오자마자, 출입 기자들이 이에 대한 질문을 쏟아부었습니다. “한러 공동성명에 ABM조약의 ‘보존과 강화’를 명시한 것은 미국의 NMD체제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는 것 아닌가”, “다음 달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러 공동성명에 미국을 자극할 수도 있는 부분을 넣은 것은 어떤 의미인가.”

조선일보

2001년 2월 한러 정상회담을 톱 기사로 다룬 조선일보 지면 (2001년 2월 28일자 1면). 두번째 부제에 'ABM 조약 개정 반대, 美 입장과 상반'(빨간 네모 표시)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이어서 3면에 '한-러 反NMD 손잡나'라는 제목의 해설 기사를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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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외교부 당국자는 한러 공동성명에 언급한 ABM조약 관련 문구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표현이며, NMD체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같은 표현이 “2000년 4월 핵확산금지조약(NPT)평가회의, 유엔 안보리 상임5개국 공동선언문, 2000년 7월 오키나와 G8정상회의 공동코뮤니케에 공통으로 들어가 있는 표현이므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강조했지요. 그러나 외교부 출입기자들은 이 표현이 다자회의가 아니라 한러 양자 간 정상회담 후 발표된 성명에 포함된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또, 이 문구가 국제적으로 통용되더라도 새로 취임한 부시 대통령과 다음 달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런 내용이 들어간 것은 외교적으로 미숙한 조치라고 봤습니다.

더욱이 이보다 앞서 6일 전인 2월 21일 이정빈 외교부 장관이 상공회의소 초청연설을 통해 NMD 체제에 대해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발언을 한 바 있었습니다. 이 장관은 “미국이 NMD 문제를 생각하는 원인은 일부 국가가 장거리미사일을 개발하고, 그 미사일로 미국 본토가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라며 “미국이 NMD를 강력히 추진하는것 보다는 이같은 원인제공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빠르고 쉬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새로 출범한 부시 행정부에는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는 발언이 사전에 있었던 겁니다.

◇ “한국이 동맹국 미국이 아닌 러시아 편을 들었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외교부 출입기자 중 상당수는 한러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포함된 ABM 관련 내용이 가볍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외교부는 기자들의 문제제기가 심상치 않다고 보고, 긴급회의를 가졌습니다. 약 2시간 뒤인 오후 5시30분쯤 최영진 외교정책실장(외교부 차관, 주유엔대사, 주미대사 역임) 이 기자실을 찾아왔습니다. 한러 정상회담 담당 부서가 아니라 군축·비확산을 담당하는 부서의 책임자가 설명하러 온 겁니다.

“오늘 공동성명에 포함된 ABM조약 관련 내용은 지난해 미국도 찬성한 내용이다. 이 표현은 가치 중립적인 표현이다. NMD와 관련된 문제라기보다는 핵무기를 어떻게 감축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조항이 미국이 추진하는 NMD체제에 마치 반대하는 것처럼 보도한다면, 잘못된 것”이라며 보도자제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앙 일간지 대부분은 한·러 공동성명 중 ABM 조약과 관련된 부분을 일제히 가판(街販)신문부터 기사화했습니다. 한·러 공동성명 내용이 공개돼 러시아는 물론 다른 모든 국가에서 알게 될 텐데, 우리만 이를 모른 척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조선일보는 ‘ABM 조약 개정 반대, 美 입장과 상반(사진)’, 중앙일보는 ‘반(反) NMD 러 입장 우회표현’, 한국일보는 ‘ABM조약 보존·강화 논란’, 한겨레는 ‘미 NMD추진 견제 우회 언급’ 등의 제목으로 눈에 띄게 보도했습니다. 가판 신문에 미처 이 기사를 쓰지 않은 일부 매체는 시내판에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이날 저녁 다시 긴급회의를 가진 후, 각 언론사 데스크들을 접촉해 기사의 수위를 낮추려 했으나 무위에 그쳤습니다. 정부 당국자들은 “한국 언론이 NMD체제, ABM조약 내용도 모르고, 센세이셔널리즘으로 보도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주장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것임이 곧 드러났습니다.

조선일보

한러 정상회담 공동성명 논란 확산을 다룬 조선일보 2001년 3월 1일자 1면 톱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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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신문 “푸틴 대통령의 외교적 승리”

다음날인 28일. 일본의 아사히(朝日) 신문은 한러 정상회담을 다룬 기사 제목을 “한·러, ABM조약은 중요”를 제목으로 뽑으며 이를 비중 있게 보도했습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더 적극적으로 나왔습니다. 이 신문은 “김대중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 1주일을 앞두고, 미국의 NMD체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공개적으로 러시아 편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신문은 “미군 3만7000명의 도움으로 보호받는 한국의 김 대통령의 이런 선언은 지금까지 미국의 아시아 동맹국들에 의한 입장 표명 중 가장 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한국이 미국의 NMD체제를 비판하다’ 는 기사에서 “한국이 미 동맹국과의 대열을 흐트러뜨렸다”고 했습니다. 한국 언론뿐만 아니라 외국 언론이 일제히 이 문제의 심각성에 주목한 것입니다.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김(대통령)의 실수” 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미사일방위에 대한 김 대통령의 실수는 그가 세계 안보라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강한 의지력이 결핍돼 있음을 보여준다”고 논평했습니다. 이 신문은 “한국의 외교통상부가 한러 공동성명에 미국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없다고 부인하는 성명을 서둘러 발표했다는 사실은 바로 이것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러시아의 대표적 일간지 이즈베스티야지(紙)는 “한국 대통령이 미국의 계획에 반대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은 푸틴 대통령의 외교적 승리”라고 했습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이번 회담은 경제협력과 한반도 안정을 주로 다뤘지만 ‘숨은 주제’ 는 대미 정책이었다”며 “러시아 측은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대신 미국이 도입하려는 NMD를 견제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전 세계 주요 언론이 한러 정상회담 공동성명 내용을 크게 보도하면서 이 사건은 1주일 앞으로 다가온 김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다음 회에 계속>

P.S.

1. 실제로 부시 행정부는 한러 정상회담에서 ABM조약의 ‘보존과 강화’를 명시한 지 10개월만인 2001년 12월 이 조약으로부터 탈퇴의사를 밝힙니다. 이에 따라 그후 6개월 후인 2002년 6월 공식 탈퇴가 확정돼 양국간 긴장완화조치였던 ABM 조약은 1972년 체결된 후 30년만에 폐기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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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외교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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