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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4 (일)

[에버라드 칼럼] ‘외세 침략’ 신기루와 싸우는 북한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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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은 북한 김정은 정권에게 극적인 순간이었다. 요란한 환대를 받으며 만난 북·러 정상은 기존의 선린 우호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는 새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북한에 중대한 외교적 승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새 조약 4조에서 일방이 무력 침공을 받게 되면 타방은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는 러시아가 북한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1961년 양국이 체결한 조·소 동맹 조약에도 상호 군사 지원 내용이 담겼지만, 1996년에 폐기됐다. 그 이후 북한은 줄곧 러시아에 유사한 조약을 요구해왔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북한 정권 입장과는 군사 지원을 약속하는 조약을 맺고 싶지 않았던 러시아가 그동안 강하게 버텼다. 이번 푸틴 방북으로 북한은 마침내 그 소원을 이뤘다.



북·러 조약은 외교적 승리이지만

식량 등 경제 문제는 여전히 심각

핵무기는 김정은 정권 못 지켜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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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새 조약이 비준되고, 만일 북한이 한국을 공격한다면 6·25전쟁 때 그랬던 것처럼 남침을 정당화해서 러시아의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아직은 북한군의 우크라이나 전쟁 참전을 확인할 징후는 없다. 이번에 체결한 조약 어디에도 러시아가 이미 참전 중인 전쟁을 북한이 지원해야 한다는 조항도 없다.

새 조약 5조에 따르면 양국 모두 ‘타방의 핵심 이익을 침해하는 제3국’과 협정을 체결할 수 없다. 이는 한·러 관계 발전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지난달 5일 푸틴 대통령이 “한반도 전체에서 양자 관계 발전에 관심이 있다”고 한 발언이 무색해졌다. 러시아가 북한에 자국의 외교적 거부권을 양도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푸틴의 방북으로 흡족해했을 김정은의 기쁨도 오래가지 않았다.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1일 사이 묘향산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0차 전원회의 확대 회의에 김정은이 참석했다. 그런데 표정을 보니 이례적으로 침울했다. 공개적으로 경제 문제와 정권 조직의 부패·무능을 우려해 온 북한 정권은 이번 회의에서 이 문제를 또 다뤘다. 정권 차원에서 얼마나 우려가 큰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정은은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번 회의에서 심각한 경제 상황이 논의됐다지만, 그 누구도 이번 북·러 조약이 어려운 경제 상황을 타개할 기회가 될 거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새 조약 9조에 쌍방이 식량과 에너지 안보 분야 도전에 공동으로 대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회의에서 보인 침묵을 볼 때 북·러 조약이 대규모 곡물이나 석유 지원으로 이어질 것을 기대하는 이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 경제의 암울한 미래가 그려진다.

푸틴의 방북과 북·러 조약 체결, 이어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는 북한 정권의 정책 결정의 모순과 비일관성을 보여준다. 외견상 북한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국가를 수호하는 데 상당히 성공했다. 현대적 무기 개발에도 상당한 진전을 이뤄냈다. 이에 더해 이제 러시아를 동맹국으로 보유하게 됐다.

그러나 모든 노력과 재원, 그리고 정권 고위급 차원의 관심에도 사실 북한은 지금 신기루를 좇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북한이 상정하고 있는 문제라는 것은 외세의 침략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외세 침략 문제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정권 수뇌부가 북한이 진짜 마주하고 있는 문제이자 어쩌면 북한에 가장 큰 위협인 경제 파탄과 정권 조직의 부패·무능을 해결할 묘수가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북한이 항상 비합리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김일성과 김정일도 실정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신중하고 체계적인 정책 결정을 했고, 북한이 직면한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직시했다. 김정은 이후 북한의 비합리적 행태가 더 두드러졌다고 보는 것이 맞다. 경제 안정과 효율적인 국가 운영보다 첨단 무기 개발에 중점을 두고 있는 김정은의 정책은 인접국에 위협일 뿐만 아니라 북한 정권 자체에도 좋지 않다.

굶주리고 분개한 북한 주민이 폭동을 일으키고, 무능하고 냉담해진 간부들이 폭동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때는 핵무기도 김정은 정권을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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