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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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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호의 오페라 이야기] 보이지 않는 요정, 프롬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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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 공연 모습 / 국립오페라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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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오페라극장에서 중요한 직업 중에 하나는 바로 프롬프터였다. 프롬프터는 오케스트라 피트 바로 위에 자리 잡은 상자에서 성악가들에게 첫 단어를 알려주는 이들이다. 독일어로는 수플뢰(Souffleur), ‘숨을 불어넣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탈리아 오페라가 한창이던 18세기부터 존재하던 프롬프터는 이제 많은 극장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의 역할은 성악가들에게 숨을 불어넣는 요정이자 전설로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프롬프터를 떠올리면 성악가들과 함께 긴장하며 그들의 뜨거운 입김과 침 세례를 받아야 하는 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라이프치히극장의 프롬프터, 잉그리드가 생각난다. 어느 날 인사를 나누며 “보통 낮에는 뭐 하세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잉그리드는 “개인적인 시간을 내기 어려워서 요가를 배우고 싶어도 못해요”라고 했다. 오전에는 성악가들과 함께 4시간 정도 연습하고, 저녁 공연에 바로 투입되어 늦은 밤에 귀가하는 일이 일 년 내내 반복된다고 했다.

또 공연에 일어나는 수많은 변수로 인해 공연마다 신경이 곤두선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프롬프터는 첫 마디를 던져주는 것 뿐만 아니라 박자와 리듬을 놓치지 않게 도와준다. 대타 성악가가 올 때면 빠르게 성악가의 성향과 준비 정도, 긴장감, 호흡 등을 분석한다. 짧은 시간 동안에 엄청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계속해서 프롬프터 상자를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지독하게 긴 바그너 오페라도 견딜 수 있게 했던 몇 개의 커피콩과 성악가들에게서 “당신이 오늘 나를 20번이나 구해줬어요”라는 말 한마디 덕분이었다. 그녀는 다른 직업을 선택할 생각을 한 적이 없을 만큼 프롬프터가 멋진 직업이지만, 이런 종류의 일은 언제나 숨어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다면 많은 스태프, 성악가 등이 만들고자 한 무대 위 세계에 대한 배신일 것 같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수많은 청중 앞에서 어느 날은 러시아어로, 그 다음 날은 프랑스어로 노래한다고 상상해 보자. 한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가사가 기억나지 않고 음악은 무자비하게 흘러간다. 아찔한 상황에서 프롬프터가 던져주는 한 글자, 리듬, 박자는 말 그대로 공연에 다시 숨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성악가들이 무대 위에서 안심하고 날아다닐 수 있게 하던 잉그리드가 27년 동안 해오던 상자 속 요정 역할에서 은퇴한다. 가끔은 성악가의 호흡이자 언어였던 그녀가 그리울 것 같다. 고마운 요정, 잉그리드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최상호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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