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한 서울대 의대 정보의학 교수·정신과전문의 |
인류 역사에서 유구히 전수돼온 수많은 조직 또는 기관 중에 가장 오랜 세월 살아남은 것들은 무엇일까? 많은 분이 예상하듯 사원이나 교회 같은 종교 시설 중에는 수백년, 혹은 천년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것들이 많다. 국가의 수명은 대체로 몇백 년을 넘기지 못한다. 기업의 역사는 더 짧다.
종교시설 다음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생존해온 조직에는 놀랍게도 '학교'가 제일 많다. 전 세계적으로는 5~6세기경에 많은 학교가 설립됐고, 그중 일부는 지금까지도 운영 중이다. 최초의 대학교는 이탈리아의 볼로냐 혹은 파비아대학교나 프랑스의 파리대학교로 알려져 있다. 거의 1000년 전이다. 한국의 높은 교육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여유 있는 계층은 자녀 교육에 정말 많이 투자했다. 유럽의 대학교 설립은 중세 종교 시설에서 주로 행해진 학문 탐구와 전문가 양성의 전통을 이어받은 경우가 많다. 1636년에 캠브릿지에 세워진 하버드대학교의 첫 단과대학은 '하버드 칼리지(Harvard College)'로 인문학, 과학, 사회과학 등을 교육했다. 두 번째 단과대학은 1782년 설립된 의과대학이고 세 번째로 1816년 신학대학이 설립된다.
전통적인 학문에 이어 그동안은 도제로 전수돼온 다양한 '기술학(테크놀러지)' 분야에도 정규 고등교육 붐이 불기 시작한 것은 또 많은 시간이 지난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서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공과대학의 효시라고도 불리는 MIT가 하버드대 남쪽에 설립된 것은 1861년의 일이다. 당시의 사회 신분 계층으로 보면 그리 높았다고 볼 수 없을 다양한 기술학 분야들이 새로이 정립되는 과정을 바라보는 전통 대학교들의 시선은 다소 양가적이었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알 수 없지만 '귀족이나 상류층이 바라보는 중류계층의 약진에 대한 약간의 불안감'도 있었다. 처음에는 무시했다. 하지만 MIT의 성장은 놀랍게 빨랐고 현대사회에서 기술학의 중요성은 점점 커질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20세기에 들어 그 성장 속도는 더 빨라졌다. 조지아텍, 칼텍과 같은 유수의 기술학 고등교육기관들이 설립되고 약진했다. 당시 신설 MIT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막강한 권력과 자금을 가진 하버드대는 바로 옆 동네에서 급성장하는 MIT의 합병을 시도했다.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지만, 유학 시절 개인적으로 전해 들은 이야기들에 따르면 매우 치열하고 심각한 '전쟁'을 치른 듯하다. 복잡한 역사적 갈등은 생략하고, 당시 힘의 우위로는 압도적이었던 하버드대였지만 MIT를 직접 합병하기에 걸림돌이 되는 계약 건이 있었고, 결국 두 대학은 원만한 협상을 끌어낸다. 그 협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의학과 기술학 분야의 협력인 건강-과학-기술학 대학(HST·Health Sciences and Technology, 1970)의 공동설립이며, 향후 하버드는 공과대학을 설립하지 않을 것이며, MIT는 의과대학을 설립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 두 대학 간의 '평화공존협정'이다.
하버드의대와 MIT는 공동의 대학교인 'HST(Harvard-MIT Division of Health Sciences and Technology)'를 캠브릿지의 MIT 캠퍼스 내에 설립했다. 지금의 켄달스퀘어(Kendall Square) 옆이다. 두 초일류 대학 간의 신사협정으로 의학-과학-기술학 협력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고, 켄달스퀘어는 바이오·의료 혁명의 메카가 됐다. 새로운 문물을 배우려 무작정 보스턴행을 택했던 필자가 우연한 기회에 영문도 모르고 HST에서 학위를 받은 첫 한국인이 되었을 당시의 켄달스퀘어는 거의 허허벌판이었다. 협동조합 매장과 호텔 하나 그리고 카페테리아 몇 개가 전부였다.
'상전벽해', 지난 10여년 간 켄달스퀘어에는 모더나, 바이오젠과 같은 자체 창업 회사 군단뿐 아니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를 포함한 전 세계 모든 빅테크와 거의 모든 다국적 빅파마의 연구소가 즐비하다. 허허벌판은 서울시 재개발 동네를 방불케 하는 건설 현장이 되었다. 당시 MIT 소유였던 허허벌판을 빅파마와 빅테크에 분양해 확보한 자금도 상상을 초월한다. 원래 운용펀드가 없었던 MIT는 막강한 최대 운용펀드와 수익률을 자랑해온 하버드를 이미 초월했다. 국내에서도 HST 설립을 위한 시도가 분주하다. 대학교 영문명칭에 '-ST' 즉 과학, 기술학 명칭을 가진 국내 유수의 공과대학이 바이오 분야와 의학 분야 협력에 앞다투어 나서고 있다. 단순히 의대설립을 통한 학교발전 목적이 아니라, 미래산업인 바이오와 의료 산업 및 융합 기술학 발전을 위한 큰 발걸음이 되길 기대한다.
김주한 서울대 의대 정보의학 교수·정신과전문의 juha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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