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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 전인 1972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세대교체론’을 앞세워 미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상원 입성에 성공했다. 당시 30세였던 정치 신인 바이든은 3선에 도전하는 62세 공화당 중진에 맞설 희생양으로 투입됐다. 하지만 그는 기적적인 역전승을 선보였다. 정치인 바이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미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이 된 그가 21일(현지 시간) 민주당 대선 후보 사퇴를 선언했다. 내년 1월 임기까지 레임덕이 우려되는 가운데 그의 정치 인생 또한 마침표를 찍게 됐다. 바이든 대통령에게 지난달 27일 TV토론으로 촉발된 인지력 저하 논란은 끝내 넘기지 못한 역경이 됐다.
돌이켜보면 바이든 대통령은 정치인이 되면서부터 큰 역경을 맞이한다. 당선 41일 만에 아내 니일리아와 13개월 된 딸 나오미를 교통사고로 잃었기 때문이다. 낙담한 바이든 대통령은 상원의원 직을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에게 “역경을 받아들이라”고 조언하며 상원의원 선서를 하게 설득했다. 남동생 프랭크의 소개로 1975년 만난 고등학교 영어 교사인 질도 곁에 있어줬다. 질은 어머니를 잃은 유치원생 보와 헌터를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질과 바이든 대통령은 2년 뒤 결혼해 가족이 됐다.
안정적인 가정을 꾸린 바이든 대통령은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한다. 상원 법사위원장(1987~1995년)과 외교위원장(2001~2002, 2007~2008년)을 거치며 의회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당내 온건파로 초당적 협력과 실용주의를 기치로 삼았다. 그러나 대통령과는 인연이 없었다. 1988년과 2008년에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도전했지만 중도 하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첫 흑인 대통령을 꿈꾸는 47세 초선 상원의원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선 후보가 그를 러닝메이트로 발탁한 것. 무난함이 노련미로 재평가된 순간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외교통으로서 전문성을 강조했다. 노동자 집안에서 자랐다는 ‘중산층 조’ 이미지와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도인 점도 내세웠다. 아픈 가정사가 국민들의 동정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털고 일어나라(Get Up)!”는 그를 상징하는 구호가 됐다.
마침내 백악관에 입성해 8년간 부통령으로 지냈건만 2016년 대선 출마는 포기했다. 2015년 정치적 후계자로 꼽히던 장남 보가 46세에 뇌종양으로 숨졌기 때문이다. 바이든은 아들을 잃은 비극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오해를 피하고 싶어 출마 선언조차 하지 않았다. 또 오바마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당시 민주당 분위기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지지했다.
4년 뒤 바이든 대통령은 2020년 대선에 출마했다. ‘분열의 정치’를 구사하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에 맞서 민주당 집권의 길을 열어줄 ‘전환기’ ‘가교(bridge)’ 대통령 역할을 자처했다. 그리고 그는 트럼프를 꺾었다.
하지만 올해 재선에 도전하면서 바이든 대통령은 인지력 저하 논란에서 비롯된 사퇴 요구에 버텼지만 결국 손을 들었다. 이제 바이든 대통령은 재선을 포기한 미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다.
이지윤 기자 asa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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