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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8 (일)

악의 일상성 파고든 한국형 현대 누아르[정보라의 이 책 환상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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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사건 파헤치며 마주하는 진실

어딘지 우리와 닮은 듯한 용의자들

◇용의자들/정해연 지음/290쪽·1만5500원·위즈덤하우스

동아일보

한국에서 장르문학 전체가 ‘추리소설’로 통칭되던 시절이 있었다. 1965년 문윤성 작가가 유토피아 공상과학(SF) 소설 ‘완전사회’로 수상한 문학상의 이름은 주간한국 추리문학상이었다. 추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소설인데도 이 작품이 추리문학상을 수상한 이유는 1960년대에 SF는 성인 독자들을 위한 독립된 장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시절에 SF는 ‘공상과학’이고 ‘실현될 가망이 없는 일을 마음대로 상상’해서 쓰는 이야기였으며 주로 어린이를 위한 장르였다.

그로부터 60년이 흐른 지금 대형 서점에 가 보면 한국 장르문학을 대표하는 명칭은 이제 SF가 된 것 같다. ‘한국 SF’라는 큰 간판 아래 ‘추리소설, 로맨스, 판타지’ 등 다른 장르 명칭들이 나열된 모습은 한국 SF의 성공을 방증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에서 장르문학이 대중예술로서 아직도 불안정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른 대중예술 분야, 예를 들어 대중음악에서 트로트를 ‘K팝’으로 통칭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정보라 소설가


이렇게 장르문학의 위상과 정의가 요동치는 한국에서 정해연의 ‘용의자들’은 추리소설이 사회비판적인 사실주의 대중문학 장르로서 어떤 깊이를 가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고등학교 3학년인 ‘유정’이 살해당하고, 유정의 친구와 선생님 등 주변 인물들이 용의선상에 오른다. 작가는 중심인물 다섯 명을 골라 챕터마다 서로 다른 인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이런 형식을 통해 작가는 피해자의 친구, 피해자의 부모, 피해자의 선생님 등의 껍질을 들어 올려 그 아래 숨겨진 진짜 삶과 진짜 인물을 간결하고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작가가 선별해서 드러내는 모든 용의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자기중심성이다. 이기심과는 약간 방향이 다르다. 능동적으로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거나 어떤 이득을 목적으로 해서 계획적으로 남을 착취하는 종류의 적극적인 악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용의자들이 가진 자기중심성은 자기 발밑에서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가깝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취약성에서 비롯된다. 불안정한 환경에서 어른들에게 정서적으로 현실적으로 의지해야만 하는 미성년자라는 취약성, 젊은 나이에 경력이 단절된 채 아이를 홀로 키워야 하는 입장에 처한 여성의 취약성, 배우자의 학대와 가정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의 취약성. 작품 속 중심인물 모두 이런 취약한 상황에 내던져져 생존을 위한 소리 없는 분투에 매몰되는 바람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청소년, 평범한 이웃에서 ‘용의자들’이 된다. 이들의 사연은 흔하고, 이해하기 쉽고, 그래서 더욱 절망적이다.

작가가 용의자들 각자의 관점을 번갈아 가며 당사자 입장에서 서술하기 때문에 추리의 주체는 책을 읽는 독자다. 바로 이 점이 추리소설 본연의 즐거움을 증폭시킨다. 작가는 이 모든 사건을 촉발시킨 진짜 악의를 소설의 마지막에 밝힌다. 그러나 그조차도 근본적으로 너무 미성숙하고 어리석어서 슬플 정도다. 모든 용의자들이 평범하기 때문에, 그들의 자기중심성을 나 자신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어둡고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이런 측면에서 ‘용의자들’은 정교한 구조 안에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는 훌륭한 한국형 현대 누아르다.

정보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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