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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 (금)

‘나’를 프린트하다…여름철 벌어진 ‘이상한 티셔츠’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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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학교나 직장에서 대놓고 쓰지 못하는 비속어 등을 티셔츠 위에 우회적으로 표현해 웃음을 주기도 한다. | 온라인 쇼핑몰 지그재그 홈페이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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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차려입는다는 개념은 없다. 단지 이상한 티셔츠를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서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다.”

지난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러한 내용의 게시물이 공유되며 ‘이상한 티셔츠’ 사진이 줄줄이 이어졌다. 엑스(X·옛 트위터) 일본 트윗 번역계(@jima_japanese)에 처음 올라온 이 글은 약 2만5000회 리트윗되며 퍼져 나갔다. 누리꾼들은 “(이 정도면) 예선 통과?” “지금 옷장 뒤지는 중” “오라, 이상한 티셔츠의 계절이여” 등의 댓글을 달며 자랑대회에 ‘참전’했다. “이상한 티셔츠가 없는 게 가오 상한다” 같은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누리꾼들이 공유한 티셔츠 사진을 보면, 인터넷 밈(meme·온라인에서 다양하게 복제되는 콘텐츠)이나 영화·드라마 패러디 등 다양한 콘텐츠가 프린트 소재로 활용된다. ‘더우니까 붙지 마세요’ ‘체력부족, 말 걸지 마시오’ ‘기분 좋아!’ 등 감정과 상태를 나타내는 티셔츠, 신체 일부를 세밀히 그려넣어 착시를 일으키는 티셔츠도 있다. ‘이상한 티셔츠’는 어떻게 여름철 대세가 됐을까. 각자의 개성이 담긴 티셔츠를 입는 이들의 이야기와 티셔츠 디자이너의 견해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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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감정과 상태 혹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자유롭게 표현한 티셔츠가 젊은 세대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 온라인 쇼핑몰 마플샵 홈페이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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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감정과 상태 혹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자유롭게 표현한 티셔츠가 젊은 세대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 온라인 쇼핑몰 마플샵 홈페이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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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은정씨(27)는 IT계열 스타트업에서 일한다. 한 달 전 온라인 쇼핑몰에서 연두색 티셔츠를 구매했다. 앞면에는 ‘기분’, 뒷면에는 ‘좋아!’라고 새겨져 있어 하나의 메시지를 이룬다. “기분 안 좋을 때 입으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싶었어요. ‘힘내’ ‘싫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출근한 적도 있는데, 동료들이 ‘깔깔’ 웃더라고요. 아마도 제가 다니는 회사가 비교적 개방적인 분위기라서 가능한 일이겠지만요.”

방씨에게 티셔츠는 일종의 ‘걸어다니는 SNS’다. “요즘은 사람들이 최대한 많은 통로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하잖아요. 티셔츠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에요. 예를 들어 말을 하는 건 특정 집단 내에서 이뤄지지만 옷은 입고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 남녀노소 제 옷에 담긴 메시지를 볼 수 있으니까요.”

눈에 띄는 티셔츠를 입는 행위는 ‘유쾌한 일화’가 하나둘 쌓이는 경험으로도 이어진다. 직장인 구모씨(30대)는 ‘사랑받고 자란 티’라고 적힌 검은색 티셔츠를 종종 입는다. “얼마 전에 동네 아저씨가 저를 보고 ‘사랑받고 자랐나보네요’라고 하고 지나가시더라고요. 평범한 티셔츠를 입고 나갔다면 겪지 않았을 에피소드가 생기는 게 좋은 거예요. 티셔츠 때문에 잠깐이라도 즐거울 수 있는 거죠.”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술을 끊으니 인생이 술술’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술을 사러 갔더니 계산대 직원이 웃음을 터뜨렸다는 등 ‘티셔츠 경험담’이 여럿 올라온다. 드라마 <마인>(2021)에서 극중 한진호(박혁권)가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에서 입고 나온 뒤 온라인에 구입 문의가 쇄도한 티셔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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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일부를 세밀히 그려 넣어 착시를 유도하는 티셔츠도 있다. | SNS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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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이른바 ‘오타쿠 티셔츠’를 찾는 이들도 있다. 공기업 인턴사원 한성준씨(25)는 각각 8만원, 4만원가량의 애니메이션 티셔츠를 두 장 가지고 있다. 한씨는 “일본인 디자이너가 제작한 티셔츠가 인기를 끌었던 것이 국내에도 들어오면서 인스타그램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보기에 ‘예쁜’ 옷은 아니라서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일 수도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입고 다니면 오히려 ‘옷 잘 입는다’고 생각해주는 분위기도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유행이 가능한 배경에는 개인이 티셔츠를 맞춤 제작하기 쉬워진 영향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티셔츠나 양말 등을 소량 제작해 판매할 수 있는 플랫폼 ‘마플샵’이 대표적이다. 해당 플랫폼에서는 디자인 파일을 만들 수 있는 전용 서비스를 이용해 간편하게 티셔츠를 완성할 수 있다. 마플샵에 따르면, 2022년 32만건이었던 연간 거래 건수가 지난해 92만건으로 1년 새 3배로 뛰었다. 마플샵에서 티셔츠 도안을 판매하는 디자이너 추세아씨(30)는 “통상 디자이너들에게는 ‘최소 수량’을 맞춰야 한다는 장벽이 있는데, 딱 1장만 팔아도 된다는 게 장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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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방영한 tvN 드라마 <마인>의 극 중 한진호(박혁권)가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에서 ‘희♣망 술을 끊으니 인생이 술술’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 이 장면이 방영된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구입 문의가 쇄도했다. | SNS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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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셔츠는 중세시대 군인이 입던 속옷에서 유래했다. 세계대전 후 일상에 복귀한 군인들은 여전히 티셔츠를 입고 생활했고 이것이 점차 대중에게 확대돼 노동자 계급이 즐겨 입는 생활 복장이 됐다. 이후 티셔츠는 노동자와 연대하는 의미 혹은 젊음·반항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자리했다. 유니섹스, 팝 문화 등 시대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티셔츠 1000개의 디자인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책 <행동을 프린트하다> 저자 라파엘 오르시니는 티셔츠를 현수막, 깃발, 광고판 등에 비유했다. 그는 책에서 “평범하던 면 티셔츠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이 입는 옷이 되면서 패션계를 뒤흔들었다.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현수막도 될 수 있고, 전문가 집단의 제복도 될 수 있고, 음악 팬의 열광의 상징도, 정체성의 표지도, 홍보 포스터도 될 수 있다. 티셔츠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이며, 세대적이고 실험적인 것, 우리 시대를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썼다.

방은정씨는 티셔츠를 “도화지”라고 표현했다. “이전에는 먼저 유행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따라가는 개념이었다면 지금은 그저 각자가 좋아하는 걸 찾아 입는 분위기예요. 우리는 티셔츠에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뭐든지, 원하는 대로 말이에요.”

강은 기자 e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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