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7대 앙카라 착륙, 동시교환
1일 밤 미국 메릴랜드주(州) 앤드루스 합동 기지에 도착한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에반 게르시코비치가 마중을 나온 조 바이든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미국 메릴랜드주(州) 앤드루스 합동 기지, 암흑 속에 1일 오후 11시 38분 비행기 한 대가 착륙했다. 약 7분 뒤 엔진이 꺼지자 남성 둘과 여성 한 명이 비행기에서 내렸다. 미국과 러시아의 수감자 교환 협상이 타결됨으로써 이날 러시아를 떠나 미국으로 온 이들이다. 활주로에서 기다리던 조 바이든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이들을 맞았다. 짧게는 약 1년, 길게는 5년 동안 러시아의 교도소에서 생활했던 이들이 고통의 시간을 끝내는 순간이었다.
미국과 러시아 정부는 이날 간첩 혐의 등으로 수감돼 있던 총 24명의 수감자를 맞교환했다고 밝혔다. 냉전 이후 이뤄진 서방과 러시아 사이 최대 규모의 수감자 맞교환이다. 미국·독일 등 서방국이 러시아인 수감자 8명을 석방하고, 러시아가 이의 두 배 수준인 서방 측 수감자 16명을 풀어주는 방식이다. 러시아인 수감자는 미국·독일·슬로베니아·노르웨이·폴란드 교도소에 분산돼 있었고, 서방국 출신 수감자는 러시아와 우방 벨라루스에 갇혀 있었다. NYT는 “1일 비행기 일곱 대가 튀르키예 앙카라에 착륙해 승객(각국의 수감자)을 교환함으로써 대중의 눈엔 드러나지 않았던 외교전이 마무리됐다”고 전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2018년 12월 체포되고 나서 수감돼 온 미 해병대 출신 폴 휠런, 월스트리트저널(WSJ) 러시아 특파원으로 일하다 지난해 3월 체포된 에반 게르시코비치, 러시아계 미국 언론인으로 지난해 10월 체포된 자유유럽방송 기자 알수 쿠르마셰바 등 셋이다. 모두 첩보 혐의를 받았고, 본인들은 통상적인 정보 수집 활동일 뿐이었다고 반발해 왔다. 러시아에서 풀려나 독일로 간 수감자 대부분은 러시아 야권 지도자였던 알렉세이 나발니(사망)와 함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맞서며 정치 탄압을 받았던 이들이다. 반면 서방국에서 풀려나 러시아로 돌아간 이 중엔 청부 살인을 저지르거나 해킹으로 거액을 탈취하는 등 형사 처벌을 받아야 하는 중범죄를 저지른 이가 많다.
1일 전격적으로 공개된 수감자 교환은 미국·러시아·독일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돌아간 치열한 외교전(戰) 끝에 이뤄졌다. NYT에 따르면 수감자 교환을 위한 협상은 2022년 12월부터 진행됐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슬로베니아에서 체포된 러시아 첩보원 부부와 2020년 체포된 해병대 출신 휠런을 맞교환하는 방안을 추진한 것이 시작이었다. 협상이 난항을 겪자 미 국무부에서 소규모 교환이 아닌, 다수 대 다수 맞교환 협상이 나을 수 있다는 제안이 나왔다. 양복 상의(上衣) 주머니에 부당하게 수감된 미국인 명단을 매일 넣고 다닐 정도로 이 문제에 몰두해온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바이든에게 대규모 맞교환을 지난 3월 제안했다. 바이든이 이를 승낙하고 러시아도 이 방법을 선호하면서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은 러시아가 석방 명단에 넣겠다고 고집을 부린 청부 암살자 바딤 크리스코프였다. 그는 2019년 독일 베를린의 한 공원에서 전(前) 체첸 반군 야전사령관을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독일에 수감돼 있었다. 크리스코프의 석방에 대해 독일은 난감하다는 입장이었다. “살인자를 풀어주면 푸틴이 나중에 더 심한 범죄도 저지를 수 있다”는 부정적인 여론도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미 정부는 독일 측과 끈질긴 협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해 WSJ의 러시아 특파원이었던 게르시코비치가 간첩 혐의로 체포되면서 협상은 또 다른 전기를 맞았다. 미 언론의 지속적 석방 요구가 이어졌고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게르시코비치의 모친이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를 만나 “아들을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독일은 결국 지난 2월 초, 러시아에 수감 중이던 반(反)푸틴 정치인 알렉세이 나발니를 명단에 넣는다는 조건으로 수감자 교환에 동의했다.(나발니는 2020년 독살 시도 후 독일에서 치료받는 등 독일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왔다.) 러시아가 나발니 석방에 뜻밖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며 협상이 진전됐지만 지난 2월 16일 나발니가 교도소에서 의문사하면서 협상은 한때 좌초 위기를 맞았다고 전해졌다.
어려움을 겪던 협상은 노르웨이·슬로베니아·폴란드 등이 자국 시민이 러시아에 억류된 것이 아님에도 러시아 국적 수감자들을 풀어주는 데 동의하면서 전격 타결됐다. 중재 역할을 맡은 튀르키예를 포함해 최소 7국이 협상에 관여한 셈이다. 바이든은 “협상 타결은 우리 동맹국들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나서 우리와 함께했으며 용감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이번 수감자 교환이 ‘범죄자에 대한 관용과 석방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전통적 국가적 신념과 어긋난다는 지적도 있다. 한번 범죄자를 풀어주는 예외를 두기 시작하면 악순환의 연속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미국은 적국(敵國)과의 인질·포로·수감자 맞교환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이날 소식이 알려지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소셜미디어에 “(미국 수감자 석방 대가로) 살인자, 살인범, 깡패들을 석방하는 건가”라고 문제 제기를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바이든 정부가 공적(功績) 세우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NYT도 “이번 협상이 외교의 잠재력을 보여주긴 했다. 하지만 푸틴에겐 미국인과 다른 서방국 인사를 납치하고 인질로 잡으면 ‘더러운 일’을 해낸 러시아인들을 성공적으로 되찾는 데 유리하다는 냉혹한 메시지를 줬을 것”이라고 전했다.
[뉴욕=윤주헌 특파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