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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 (월)

[데스크 칼럼] ‘무법 지대’ 방치하는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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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임신 36주 낙태’ 사건을 경찰이 수사 중이다. 25세 여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임신 36주차에 낙태 수술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담은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온 게 발단이 됐다.

이런 식의 ‘공개 낙태’에 대해 논란이 커졌다. 결국 보건복지부가 여성과 의사를 수사해 달라고 경찰에 의뢰했다. 경찰도 “무게 있게 수사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 적용된 혐의는 낙태죄가 아니라 살인죄다. 현행 형법 269조 1항, 270조 1항에 낙태한 여성과 의사를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있지만 적용할 수 없는 상태다.

이렇게 낙태와 관련해 ‘무법 지대’가 생긴 것은 국회 탓이다. 앞서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9년 낙태 처벌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국회에 2020년 말까지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했다. “낙태 허용 최대 기한은 임신 22주이며 이후에는 허용해서는 안된다” “임신 22주 이내라도 낙태를 전면 허용하면 안되고 불가피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등의 구체적 기준까지 제시했다. “법 개정 시한을 넘기면 낙태 처벌 조항은 무효가 돼 더 이상 적용할 수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국회가 법 개정을 하지 않으면서 4년째 낙태 처벌에 대한 ‘입법 공백’이 계속되고 있다. 태아의 생명권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려 14년째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야간 옥외 집회·시위를 금지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10조와 23조 1호다. 이 조항들에 대해서도 지난 2009년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국회에 2010년 6월 말까지 개정하도록 했다. 일몰 후부터 일출 전까지 옥외 집회·시위를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법률은 헌법상 기본권인 집회·시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약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국회에서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해당 조항은 효력을 잃었고 지금까지도 법 개정이 되지 않고 있다. 야간 옥외 집회·시위를 규율할 수 있는 근거 자체가 없는 ‘무법 지대’가 생긴 것이다.

경찰이 교통 소통 등을 이유로 야간 옥외 집회·시위에 금지 통고를 하더라도 법원은 상당수에 대해 전부 또는 일부 허용 결정을 내리고 있다. 작년 5월 민주노총의 ‘1박 2일 노숙 시위’에서 술판, 방뇨, 쓰레기 등이 발생해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국회가 야간 옥외 집회·시위를 합리적인 범위에서 규율하는 법 개정을 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 일이다.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했지만 국회가 법 개정을 하지 않고 있는 법률이 19건이나 된다. 여기에는 국민 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조항들이 포함돼 있다. 이 가운데 8건은 개정 시한을 이미 넘겼다.

올해 말까지 법 개정이 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 법률도 있다. ‘8촌 이내 혈족 간 혼인은 무효’라는 민법 815조 2호는 연말까지 개정되지 않으면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혈족 간 결혼이 유효하게 되는 등 사회적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또 유류분 관련 민법 조항, 친족상도례를 규정한 형법 조항도 내년 말까지 개정되지 않으면 가족 간 재산 관계와 형사 처벌과 관련해 ‘무법 지대’가 발생할 수 있다.

법률의 제정과 개정은 국회의 권한이면서 의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 5월 말 개원한 이번 국회도 특검법 등 여야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법안을 놓고 여당 필리버스터, 야당 강행 처리, 대통령 거부권, 재표결 등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런 식이면 반드시 필요한 법 개정까지 미뤄지면서 ‘무법 지대’ 방치가 계속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금원섭 사회부장(carp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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