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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 (화)

이슈 인공지능 시대가 열린다

[과학을 읽다]AI가 앞당기는 '핵융합시대'…국제협력보다 각자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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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기술 국가간 패권 경쟁

미중 갈등 속 국제 협력 사례 ITER는 지연

2030년 목표 핵융합발전 계속 연이어 등장

한국도 민관 합동으로 핵융합 '가속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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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공동 핵융합 실험 시설인 ITER 내부가 설치되고 있는 모습. ITER는 당초 2025년 가동이 목표였으나 2023년으로 연기됐다. 사진=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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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이 풍부한 전력이다. 주요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들이 탄소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생존을 위해 인공지능 시대에 동참하기 위해 대규모 데이터센터 설립에 나서자 탄소 배출량이 늘어난 것도 당연한 결과다. 대안 모색이 필요하지만 당장 뾰족한 해법은 없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핵융합(Nuclear Fusion)이다. 핵융합 발전은 중수소와 삼중수소가 융합하면서 헬륨으로 바뀔 때 나오는 에너지를 통해 전기를 생산한다. 이 과정에서 1억도가 넘는 에너지가 발생해 ‘인공태양’으로도 불린다.

먼 얘기처럼 여겨지던 핵융합 시대를 앞당긴 것이 AI인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일 수도 있다. 핵융합 발전을 서둘러 가동하는 것은 이제 기업 간의 경쟁을 넘어 국가 간의 패권 경쟁으로까지 인식될 정도다. 우리 정부도 꿈의 기술로 여겨지던 핵융합 발전을 민간 기업과 함께 이뤄내겠다는 방향으로 궤도를 수정하고 나섰다.

◇지연된 국제 협력, 가속페달 밟는 각자도생= 최근 한국과 미국, 중국, 유럽연합(EU), 인도, 일본, 러시아 등 7개국이 공동으로 개발 중인 국제핵융합실험로(ITER)의 완공 일정이 애초보다 9년 늦어진 2034년으로 지연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최초 계획대로라면 2020년 가동이 목표였지만 2025년으로 늦춰진 데 이어 이제는 2034년까지 지연되는 상황은 핵융합의 미래에 먹구름이 낀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을 수 있지만, 오히려 각국은 각자도생 방식으로 핵융합 구현 시기를 앞당기는 모습이다. 더 많은 전기가 필요해지는 상황과 달라진 국제 관계가 핵융합 발전의 속도를 높여야 하는 필요성을 키우는 모습이다. 수요가 공급을 만들어 내는 셈이다.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 우크라이나 전쟁은 핵융합 발전의 근본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핵 강국인 미국·중국·러시아의 합동 연구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만큼 이제는 각국이 경쟁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두드러진다.

미국 매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중국이 대규모 핵융합 기술 캠퍼스를 완공하고 대기업들이 포함된 국립 핵융합 컨소시엄을 출범시키면서 관련 기술 개발에 미국보다 더 큰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고 보도해 파문을 불러왔다. 미국 에너지부의 핵융합에너지과학실장인 J P 알레인은 중국이 핵융합 분야에 연간 약 15억달러(약 2조731억원)를 지출하고 있다면서 이는 미국 정부 관련 예산의 거의 두 배에 달한다고 말했다. 중국이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3~4년 뒤에는 미국과 유럽의 핵융합 능력을 능가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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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핵융합 점화에 성공한 미국 로런스리버모어 연구소의 시설. 사진=로런스리버모어 연구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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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서방 진영 핵융합 분야에서 앞서 있는 것은 맞다. 미 에너지부(DOE) 산하 로런스 리버모어 연구소(LLNL)는 2022년 레이저를 이용한 핵융합 점화에 세계 최초로 성공한 바 있다. 핵융합 실험에서 투입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된다. 그런데도 중국의 핵융합 굴기는 예사롭지 않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에 따르면 2011년 이후 중국은 전 세계 국가 중 핵융합 기술 공급망 분야에서 가장 많은 특허를 출원했다. 중국 핵융합 에너지 기업 에너지 싱귤래리티는 지난 6월 ‘훙황(Honghuang) 70(HH70)’이 최근 첫 플라스마 생성에 성공했다고 밝히면서 중국은 상업화에 한 발 더 다가섰다. 중국은 또 1000명의 핵융합 물리학자를 양성한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고 올해 초에는 핵융합을 포함한 원자력법 초안을 공개하기도 했다.

미국 에너지부가 지난해 12월 여러 핵융합 연구기관을 아울러 ‘허브’를 설립하는 프로그램에 4200만달러(약 547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것을 고려하면 중국의 핵융합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은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맹폭하는 中 견제…늘어나는 민간 핵융합 스타트업= 중국의 잰걸음에 미국은 물론 미국의 동맹국들도 핵융합 연구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7월 영국은 잉글랜드 북부 노팅엄셔 지역에 2040년대 가동을 목표로 핵융합 발전소 프로젝트(STEP)의 건립 행사를 진행했다. 영국은 1980년대부터 운영한 실험용 핵융합로 ‘JET’를 지난해 40년 만에 퇴역시킨 후 STEP를 통해 세계 최초 핵융합 발전소 가동 목표를 제시했다. JET는 지난해 하반기 진행된 실험에서 5초간 69MJ(메가줄)의 에너지를 생성해 역대 최대 규모의 에너지 생성기록을 만들어 낸 바 있다. 이는 1만2000가구에 5초간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규모다.

영국 원자력청은 STEP의 구현을 위해 AI 기술을 적극 활용할 것을 예고한 상태다. 대규모 장비를 설치하는 것만으로는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 만큼 사전에 AI를 통해 핵융합을 구현해 보고 문제점을 파악하는 과정을 통해 성공 확률과 시간을 단축하려는 의도다.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도 ‘디지털트윈’을 활용한 분석을 통해 AI를 적극 활용 중이다.

핵융합 연구의 강국인 일본도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 담당상이 최근 기자회견에서 핵융합 발전 국가전략을 개정할 방침이라며 발전 실증 목표 시기를 2030년대로 규정하고 나섰다. 이는 기존 2050년대에 비해 20년이나 앞당긴 것이다.

미국은 동맹의 규합에도 힘을 쏟고 있다. 최근 미국 국무부의 과학외교 담당자가 방한 기간 중 한국 핵융합에너지연구원을 방문해 국내 대표 연구시설인 ‘K스타’를 견학하고 한국과의 핵융합 연구를 강조한 것도 해당 분야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보여준다.

중국과의 경쟁에서 승기를 잡으려면 민간의 참여도 필수적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MIT 대학교에서 출발한 커먼웰스퓨전시스템즈(CFS)에, 오픈AI의 샘 올트먼은 헬리온에너지에 투자하고 나섰다. 핵융합산업협회(FIA)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현재 약 45개 핵융합 스타트업이 연구 경쟁을 벌이고 있다. FIA의 회원사는 매년 증가 중이다. 대부분의 회원사는 미국에 있다. 미국 기업이 25개인 반면 영국·독일·일본·중국 회원사는 각각 3곳이었다. 이어 스위스 기업이 두 곳, 호주·캐나다·프랑스·이스라엘·뉴질랜드·스웨덴이 각 한 곳의 FIA 회원사를 보유했다.

FIA가 최근 공개한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핵융합 산업 기업에 대한 투자액은 71억달러를 넘어섰지만 자금 조달 규모가 줄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지난해 투자 증가액은 14억달러로 2022년의 28억달러 대비 절반에 그쳤다. 앤드루 홀랜드 FIA 최고경영자는 "핵융합의 야심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공공 및 민간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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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지난달 22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을 방문해 핵융합로 'KSTAR' 를 시찰하고 있다. 사진=과기정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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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융합 에너지 실현 가속화 전략, K-핵융합 앞당긴다= 각국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우리 정부도 핵융합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했다. 정부는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 주재로 지난달 22일 제20차 국가핵융합위원회를 열고 ‘핵융합 에너지 실현 가속화 전략안’을 의결했다. 이번 전략안의 핵심은 연내 1조2000억원 규모의 ‘핵융합 혁신형 기술개발 및 인프라 구축 사업’ 예비타당성조사를 추진하고 민과 관이 연합해 핵융합 에너지 상용화 역량을 확보하는 데 있다. 핵융합 관련 민간의 스타트업 창업을 지원하는 ‘K-퓨전(Fusion) 스타트업 프로젝트’도 추진한다. 기존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의 K-스타 성과에 머물지 않고 민간 기업을 육성해 속도감 있게 핵융합 발전을 완성하겠다는 게 정부의 방침이다.

백종민 기자 cinqang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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