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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 (화)

[장은수의 책과 미래] 신념과 고집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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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우리는 자주 신념과 고집을 착각한다. 일관성 있다는 점에서 둘은 비슷하다. 그러나 신념과 고집은 진실에 대한 태도에서 차이 난다. 신념에는 충분한 사실 증거, 합리적 정합성 같은 진실의 판별 기준이 포함돼 있다. 영국 철학자 W K 클리퍼드는 말했다. "불충분한 증거를 근거로 뭐든지 믿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잘못이다." 신념 있는 사람은 항상 자기 생각을 검증할 준비가 돼 있다. 고집엔 이런 진실에 대한 의무와 윤리적 책임이 빠져 있다.

신념 있는 사람과 고집 센 사람은 자기 생각과 반대되는 명확한 사실이나 증거가 드러났을 때 다른 태도를 보인다. 신념 있는 사람은 현실이 변화하고 사실이 달라지면 기꺼이 말을 바꾸나, 고집 센 사람의 귀는 자기 말에만 열려 있다. 고집 센 사람은 새로운 사실이 제시돼도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비합리적 인내, 즉 과거에 대한 애착과 변화에 대한 저항성은 고집 센 사람의 특징이다.

'당신이 속는 이유'(김영사 펴냄)에서 인지과학자 대니얼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는 일관성 편향 탓에 인간은 쉽게 자기 또는 타인의 말에 속아 넘어간다고 말한다. 일관성 편향이란 인간 행동에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불일치를 적절히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대신 변함없는 일관성을 더 선호하는 태도다.

가령 손실은 모든 합법적 투자에 내재하는 특징이다. 손실 없는 투자에 가까운 것은 은행 정기예금과 미국 국채 정도다. 누군가 이보다 높은 투자 수익을 꾸준히 제공하겠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히 사기에 가깝다. 낮은 위험도와 높은 수익률을 결합해 '달까지 가자'고 외치는 목소리는 그냥 거짓이다.

그러나 우린 이런 목소리에 자주 홀린다. "일관성은 불확실성에 따른 불편함을 제거하고, 부정적 위험에 대한 두려움을 없앤다."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니라 확실성이고, 일관성은 확실성을 보여주는 좋은 지표이기 때문이다. 청문회에 나와 심문할 때마다 말을 바꾸는 공직자는 대개 거짓말쟁이다. 자기 생각을 고집 있게 밀어붙이는 지도자가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인격자나 철 따라 말 바꾸는 거짓말쟁이보다 낫다고 여기는 건 당연하다.

거기에 함정이 있다. 때때로 상황 변화가 고집쟁이를 저절로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까닭이다. 고집쟁이의 일관성은 사기나 다름없다. 저자들은 말한다. "훌륭한 리더들은 사실 변화에 따라 기꺼이 마음을 바꾼다." 열린 마음으로 변화에 따른 불일치를 받아들이는 지혜가 있을 때 우리는 고집의 유혹에 속지 않고 신념의 미덕을 받아들일 수 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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