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오는 9월로 예정된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며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지난해 불거진 자민당의 비자금 스캔들 이후 좀처럼 지지율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중의원 선거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당 차원의 우려를 의식한 행보로 보인다.
14일 일본 공영방송 NHK는 기시다 총리가 이날 오전 총리관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자민당이 변화하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야 한다. 신뢰 회복을 위한 첫 걸음으로 거취 문제를 결정했다"며 자민당 총재 선거에 불출마할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다고 보도했다.
일본은 의회의 다수당에서 총리를 맡는 내각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현재 여당이 자민당이기 때문에 자민당 총재 선거가 곧 총리를 선출하는 선거가 되는 셈인데, 기시다 총리가 총재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이는 총리를 연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한 것과 다름 없다.
그는 불출마 배경에 대해 "정치 불신을 초래한 사태를 분명히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소속 의원이 일으킨 중대한 사태에 대해 조직의 장으로서 책임지는 것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고 밝혀 지난해부터 불거진 자민당 내 비자금 스캔들이 주요한 이유였다는 점을 시사했다.
아소 다로 부총재와 상의하거나 불출마 결정을 전한 시기가 언제냐는 질문에 기시다 총리는 "여러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지막은 제가 결정했다. 이건 당연한 일"이라고 답했다.
기시다 총리는 차기 총재 선거와 관련해 "불출마를 표명한 상황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삼가겠다. 새 총재 아래에서 일치단결하고 정책력, 실행력을 가진 '드림팀'을 만들어 신뢰 회복을 위해 노력해 주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4일 총리관저에서 자민당 총재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교도통신=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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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는 기시다 총리가 "자민당 파벌의 정치자금 문제를 두고 정치의 신뢰 회복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며 파벌 해소 등의 당 개혁과 관계 의원의 처분에 더해 정치자금규정법 개정 등에 힘써 왔다"며 "그러나 정권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거세지고 내각 지지율이 침체되는 가운데 자민당 내에서는 '지금 정권으로는 다음 중의원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었다"고 불출마 배경을 설명했다.
<마이니치 신문> 역시 당 내에서 총리가 책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고 전했다. 신문은 "아베파뿐만 아니라 기시다파 역시 파벌의 회계 책임자가 입건됐음에도 최고 책임자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당 내 불만이 있었다"며 "현재 중의원 임기 만료까지 1년이 남은 가운데 기시다 총리로는 다음 선거를 치를 수 없다며 교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고 전했다.
방송은 한 자민당 간부가 "기시다 총리로부터 전화가 와서 이번 문제로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 총재 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기시다 총리만의 책임이 아니라고 설득했지만 이미 마음이 굳어진 상태였다"고 말했다고 보도헀다.
기시다 총리의 불출마를 촉발한 자민당 내 '파벌 비자금' 사건은 아베파 의원들이 정치자금 모금 과정에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본격화됐다.
이들은 정치자금 모금 행사를 준비하면서 이른바 '파티권'을 할당량 이상 판매한 소속 의원들에게 초과 금액을 넘겨줬는데, 이를 개별 의원의 회계 처리나 계파의 정치자금 보고서에 반영하지 않아 비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들이 지난 2018년부터 2023년까지 비자금으로 조성한 금액은 약 6억 엔 (한화 약 54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기시다 내각 지지율이 곤두박질치자 여당인 자민당은 정치자금 모금을 위한 파티권 구매자를 공개하는 기준액을 현재의 20만 엔에서 5만 엔으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한 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또 당이 개별 의원에게 지급하는 정책활동비와 관련해 일본유신회의 요구를 수용, 1건 당 50만 엔 이하의 지출에 대해서도 10년 뒤 영수증을 공개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자민당과 연립여당인 공명당, 일본 유신회 등의 주도로 이러한 개정안이 통과됐지만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기업과 단체로부터의 헌금 금지 등이 포함되지 않아 불충분하다고 비판해 왔다. 이들은 개정안이 현행법과 별다를 것이 없다며 참의원에서 계속 반대 입장을 고수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그러나 일본 여론은 이러한 법 개정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지난 6월 13일 일본 <지지통신>은 7~10일 18세 이상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개별 면접 방식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33%는 이번 법 개정에 대해 '별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39.2%는 '전혀 평가하지 않는다'고 밝혀 부정적 응답이 70%가 넘었다.
비자금 사건 이후 기시다 내각 지지율은 10%대로 떨어지는 등 정권을 유지하기 힘든 수준까지 떨어졌다. 가장 최근인 지난 8일 일본 <지지통신>이 발표한 여론조사에서도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은 19.4%에 그쳤다.
지난 4월 중의원 보궐선거 3개 선거구에서 모두 패배한 것도 자민당의 위기감을 증폭시켰다. 당시 기시다 총리는 일본 총리로는 9년 만에 미국에 국빈 방문했다는 외교적 성과를 강조했으나 비자금 문제로 돌아선 민심을 회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기시다 총리가 사실상 총리직을 내려놓으면서 새로운 자민당 총재로 누가 선출될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신문은 자민당 총재 선거 관리위원회가 20일 일정을 정할 것이라면서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 모테기 도시미쓰 현 간사장,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담당상 등이 총재 입후보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고노 다로 디지털상도 입후보에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신문은 "기시다 총리의 불출마 이후 각 진영의 움직임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야당인 입헌 민주당의 아즈미 준 국회대책위원장은 NHK에 "(기시다 총리가) 총재 선거에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런 의향 표명에 놀랐다. 국민이 정치와 비자금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이제야 판단한 것"이라며 "앞으로 정국 전체가 유동적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 윤석열(왼쪽)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해 3월 16일 오후 일본 도쿄 긴자의 오므라이스 노포에서 친교의 시간을 함께하며 생맥주로 건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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