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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2 (목)

[임아영의 레인보 Rainbow]자궁의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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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삶 옭죄는 ‘원치 않은 임신’

낙태죄 폐지 후에도 정책은 더뎌

위기 임산부, 원인 살피는 게 먼저

‘재생산권’으로 논의 확장할 필요

‘원치 않은 임신’은 두려운 일이었다. 두 아이를 기르는 지금도 그렇다. ‘원치 않은 임신’은 자궁이 몸 안에 자리한다는 이유로 여성이 겪어야 하는 근원적 불안일지 모르겠다. 초경 때 엄마는 말했다. “몸을 잘 간수해야 해.” 13세 초등학생은 조심하지 않으면 임신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산술적으로 30년간 ‘원치 않은 임신’을 걱정하며 살아왔다면 과장일까. 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됐던 기간은 ‘딱 2년’이었다. 두 아이를 품었던 시간이다. 안전한 남자와 사회가 용인하는 결혼제도 안에서 임신을 계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자궁은 불평등의 근원이었다. 임신과 출산만큼 여성의 삶을 뒤흔드는 사건은 없다. 혼자 임신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안전한 임신 기간’에도 남편에게는 자궁이 없다는 사실에 가끔 당혹스럽게 화가 났다. 함께 아이를 낳기로 했지만 입덧도, 출산도 자궁이 있는 몸에서만 가능했다. 괴로운 건 혼자인데 부모는 함께 된다는 것이 불공평하다 느꼈다. 자궁이 있는 몸을 ‘거룩한 모성’으로 추앙하는 시선에 이질감을 오래 느꼈다.

16일 세종시의 저수지에서 영아 시신이 발견됐고 20대 무직 여성이 자수했다. 아이 엄마는 경찰 조사에서 “집에서 혼자 낳던 중 숨을 쉬지 않아 겁이 나 유기했다”고 진술했다. 아이가 출산 후에 사망했다면 여성은 아동학대 살해 혐의를 적용받게 된다. 이 여성은 자신의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끔찍한 살인자’라고 비난하는 게 전부라면 서글프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질문은 ‘임신 후 혼자서 택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지를 고른 20대 여성에게는 무엇이 부족했을까’ 아닐까. 한국 사회에서 ‘계획 가능한 임신’이 되기 위해선 안전한 남자, 사회가 인정하는 제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경제 상황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남자가 사라진 이 여성에게는 이 조건이 다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생명은 소중하지만 인간은 보호자의 조력 안에서 성장할 수 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여성에게 모든 화살을 돌리면 생명은 더욱 위태로워진다. 낙태죄가 폐지된 마당에도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대립하는 구도 이상의 논의를 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가 깨달아야 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아이는 태어날 때뿐 아니라 자랄 때도 부모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엄마가 안전해야 아이도 안전하다는 당연한 사실 말이다.

보건복지부는 출산 사실을 주변에 알리기를 꺼리는 ‘위기 임신부’들이 의료기관에서 가명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보호출산제를 한 달 시행한 결과 14명의 임신부가 보호출산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아동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임신부들의 노력과 정부의 고심이 느껴진다. 그러나 피임에 대해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학교 성교육, ‘포괄적 성교육’을 터부시하는 종교계, 해외 출판상을 수상한 성교육 도서도 도서관에서 뺀 경기도교육청, 낙태죄가 폐지됐는데도 임신중지 시스템을 보건의료 시스템으로 어떻게 들여올지 고민하지 않는 복지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입법을 고민하지 않는 국회, 88년 전 도입돼 세계보건기구(WHO)의 필수의약품 목록에 등재되고 현재 99개국에서 안전하게 쓰고 있는 유산유도제 사용 허가를 미루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미혼모에 대한 낙인이 여전하고 한부모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는 사회에서 “제도 시행 전이었다면 놓쳤을 수 있는 소중한 생명들을 살릴 수 있었다”는 복지부 차관의 말은 공허하다.

‘자궁이 있는 몸’은 여전히 전쟁터다. 그 결과가 ‘위기 임신부’라면 원인부터 살펴보는 게 순리다. 재생산권으로 논의를 확장해야 한다. 단순히 피임할지 말지, 임신중지를 할지 말지가 아니라 여성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 그 삶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는지 살펴보자는 관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재생산권은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한다는 조건 때문에 사회적 제약을 받을 수 있기에 기회의 평등, 건강권의 관점에서 ‘베이스라인’을 맞춰줘야 한다는 논리로 커져왔다. 스웨덴은 “모든 아이가 원하는 때에 환영받으며 태어나는 것”을 보건 정책의 목표로 삼고 있다. 모든 아이가 환영받으며 태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시작해야 할까. 여성의 몸을 전쟁터로 남길 것이냐, 여성과 아동의 권리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의 열쇠는 우리가 쥐고 있다.

경향신문

임아영 젠더데스크


임아영 젠더데스크 layk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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