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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시선 사로잡는, 활짝 핀 ‘여왕의 대관식’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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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10일 천리포수목원 입구정원에서 야간개화한 빅토리아 ‘네버랜드 뭄바이’. 천리포수목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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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꽃이 수분되면 보라색으로
1837년 즉위한 여왕 이름 붙어
아름다움 뒤엔 세심한 손길 첩첩



가만히 두면 원래 깨끗하고 정갈한 것인 줄 알았다. 예를 들면 장롱에서 꺼낼 때마다 뽀송한 향기가 났던 여름 차렵이불이나, 보관 기간이 적힌 식재료 통이 가지런히 놓인 냉동실. 또는 베란다 한 편을 차지한 돌화분 위에서 무럭무럭 자라던 풍란같은 것들. 그런 당연함은 자취를 시작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의문에 봉착했다. 켜지도 않는 텔레비전 위에는 왜 자꾸 먼지가 쌓이는지, 분명히 며칠 전 청소했던 화장실 타일에 왜 자꾸 물때가 끼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던 나는 같은 청소를 수십번 반복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원래’ 깨끗하고 정갈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깨끗하고 정갈하게 보였던 것들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정성과 손길이 잔뜩 묻어있다는 사실을.



지금도 소담하게 차려진 밥상이나 탐스럽게 포장된 딸기 박스를 볼 때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정성을 거쳤을까 생각하곤 한다. 수목원 역시 마찬가지다. 가드너들의 손길이 1년 내내 쉼없이 가닿는 수목원의 다양한 공간 중에서도, 입구정원에 자리한 수조는 8월이면 탐방객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신비로운 공간으로 변하곤 한다. 바로 수조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빅토리아수련 덕분이다.





파인애플 향으로 딱정벌레 유혹





수련목 수련과에 속하는 빅토리아수련은 여러 측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식물이다. 일단 세상에서 가장 큰 홑잎(단엽)을 가졌다. 자생지에서는 잎 한 장의 너비가 무려 3m를 넘고, 잎자루의 길이도 최대 8m에 이른다. 열대성 수련인 만큼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한 여름엔 지름이 하루 최대 50㎝까지 클 정도로 빠른 성장 속도를 자랑한다. 넓은 잎의 바닥면에는 중앙에서 가장자리로 뻗는 단단한 잎맥과 푹신한 공기층이 있어 어린 아이가 올라가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한 구조를 가졌다. 19세기 대표적인 건축물이자 1851년 영국 만국박람회장으로 쓰인 수정궁이 빅토리아수련의 견고한 잎맥 구조를 본따 설계됐을 정도다. 잎 뒷면에는 억세고 날카로운 가시가 촘촘히 박혀 초식성 물고기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한다.



지름 30㎝에 이르는 거대한 꽃의 개화와 수분 과정도 흥미롭다. 잠잘 수(睡), 연꽃 연(蓮)이라는 이름답게 수련은 보통 낮에 꽃을 피우고 저녁에 봉오리를 오므리지만, 야간개화종인 빅토리아수련은 해가 진 밤에 꽃을 피운 뒤 낮에는 꽃잎을 닫는 과정을 2박3일간 반복한다. 개화 첫날 암술이 발달한 꽃은 새하얀 자태를 자랑하는데, 이때 꽃을 수분하는 딱정벌레를 끌어들이기 위해 특유의 진한 파인애플 향을 풍긴다. 다른 수련의 꽃가루가 묻은 딱정벌레가 찾아와 수분에 성공한 꽃은 이내 보라색으로 변하며 수술을 발달시킨다. 자가수분을 피하기 위해 암술과 수술의 성숙 시기를 달리하는 나름의 묘책인데, 그 과정마저도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그야말로 ‘인싸’ 식물인 셈이다.



빅토리아수련은 독특한 식물학적 특성만큼이나 전 세계 과학자와 탐험가의 흥미를 끄는 신비로운 존재였다. 1801년 식물학자 타데우스 하엔케가 1801년 아마존강 유역에서 처음 빅토리아수련을 발견했고, 이후 1837년 영국 식물학자인 존 린들리는 이 신비한 식물에 그 해 즉위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을 기념해 라틴어 학명 중 속명에 ‘빅토리아(Victoria)’를 붙였다. 활짝 핀 꽃의 모습을 두고 ‘여왕의 대관식’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남아메리카의 국가 가이아나의 국화이기도 한 빅토리아수련은 이 나라 토착 신앙에서 아름다움과 순수함, 힘을 상징한다. 아마존강 유역에서 자생하는 빅토리아 아마조니카와 파라과이강 유역 등에서 자생하는 빅토리아 크루지아나가 가장 대표적인 빅토리아수련으로 꼽히는데, 올해 천리포수목원에서는 이 둘에 더해 빅토리아 크루지아나와 빅토리아 ‘드리머’를 교배해서 선발된 빅토리아 ‘네버랜드 뭄바이’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지난 13일, 천리포수목원 기록연구팀 연구원들과 수목원 전문가 교육생들이 가슴장화를 입고 입구정원 수조 주변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2017년 조성된 입구정원의 매립형 수조는 가로 4m, 세로 10m, 깊이 1m 정도의 크기로, 거의 매년 여름 빅토리아수련과 국내멸종위기식물인 가시연꽃 등을 함께 전시해 탐방객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수조 속으로 들어간 가드너들은 약 한 시간 가량 뜰채로 이끼와 부유물을 걷어내고, 돋아난 지 오래되어 변색된 묵은 잎들을 전정가위로 잘라냈다. 뜨거운 여름 햇살에 가드너들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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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꽃 피우는 데 가장 큰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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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입구정원의 수조에서 가드너들이 수조 안을 정리하고 있다. 천리포수목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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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단순해보이는 작업이지만 열대 지역에 자생하는 빅토리아수련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도록 알맞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은 사실 만만치 않다. 수련 뿌리가 담긴 화분에는 속비료를 꼼꼼히 채워주고, 양분 공급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수조에 필렛형 비료를 뿌려준다. 가끔은 부유물을 덜 만들어내기 위해 진흙 반죽 속에 비료를 넣어 수조 아래로 가라앉히기도 한다.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이끼를 제거하고 수조를 깨끗하게 청소한다.



오랜 기간 빅토리아수련의 모습을 감상하기 위한 관리도 필수다. 빅토리아수련은 첫 꽃을 피우는 데에 가장 큰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오랜 기간 꽃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첫 꽃이 개화하기 전 일찌감치 꽃대를 잘라준다.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도록 틈날 때마다 묵은 잎을 제거한다. 열대 지역에서 자라는 빅토리아수련이 천리포의 환경에서도 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여름 내내 수조를 관리하는 가드너들의 바쁜 손길은 멈추지 않는다.



“수목원을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얼마나 걸리나요?” 탐방객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자,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보통은 2만평에 이르는 수목원을 빠르게 한 바퀴 돌면 1시간 남짓, 천천히 둘러보면 3~4시간도 걸릴 수 있다고 답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발걸음은 느려지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엔 식물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식물을 가꾸는 사람들의 정성도 포함된다. 심어만 두면 알아서 잘 자랄 것 같아 보이는 곳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철마다 새로운 꽃이 피는 화초를 심어주고, 시든 꽃대는 잘라내고, 잡초는 크기 전에 솎아낸다. 바람에 꺾인 가지들은 정리해주고, 깨지거나 떨어진 표찰이 없는지 일일이 살펴보고, 월동이 어려운 구근은 겨울이 오기 전 캐내 따로 보관한다. 뒤돌아서면 떨어지는 낙엽을 치워 오솔길을 정리하고, 이끼가 낀 연못은 주기적으로 청소하고, 사람들이 잠깐 걸터앉아 쉬어가는 벤치의 먼지를 닦는다. 그제서야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름다운 수목원의 모습이 나타난다.



황금비 나무의사



한겨레 기자로, 콘텐츠 기업 홍보팀 직원으로 일했다. 말 없는 나무가 좋아서 나무의사 자격증을 땄고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천리포수목원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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