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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그 노래에 실려 온 기억 [서울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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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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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하는 일엔 용기가 필요했다. 영화 ‘비긴 어게인’에서 댄이 그레타에게 했던 말처럼, 누군가가 좋아하는 음악은 그에 대해서 많은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소심한 나는 타인과 깊게 연결되고 싶으면서도, 늘 나를 보여주는 일이 두려웠다.



이천년대에 자란 이들이 대체로 그렇듯, 나는 엠피쓰리(MP3) 플레이어 없이는 살 수 없는 청소년이었다. 내 음악 취향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또래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좀 더 어른스럽고 특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친구가 ‘뭐 듣고 있는데?’라고 물어볼 때면 괜히 망설이게 됐다. 친한 친구일수록 더 그랬다. ‘내 취향이 별로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래서 내가 시시한 애라는 걸 들키면 어떡하지.’ 별별 걱정을 다 했다. 그러나 부산 청소년답게 호쾌한 친구들은 머뭇대는 내게서 거침없이 이어폰 한쪽을 가져가곤 했다.



‘헐. 이거 뭔데?’ 친구가 감탄사를 터뜨리면 가슴이 쿵쾅거렸다. ‘커린 베일리 레이라고, 데뷔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야, 짱이제, 맞제?’ 기다렸다는 듯 애정을 고백하며,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친구도 좋아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내 음악 취향이 꽤 쓸 만하단 걸, 내가 좀 괜찮은 애라는 걸 인정받은 것만 같아 기뻤다. 그저 음악을 함께 들어줬을 뿐인데도.



혼자 듣던 음악을 함께 들을 때면 매일 보는 교실이며 학교 운동장이 이상하게 특별해 보였다. 그때로부터 한참 시간이 흘렀는데도, 우연히 그 음악을 들을 때면 노래가 흘러나오는 조그만 스노 글로브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희뿌연 유리 벽 너머엔 교복을 입고 친구와 줄 달린 이어폰을 나눠 낀 어린 내가 상기된 얼굴로 웃고 있다.



작년 시월엔 고향에 돌아온 뒤 처음으로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을 즐겼다. 축제를 방송하기 위해 현장에 갔던 적은 있지만, 관객으로 간 건 작년이 처음이었다. 프랑스 밴드 피닉스의 무대를 보고 싶어서였다.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하던 대학생 시절, 만원 지하철에서 한때 질리도록 들었던 음악이 피닉스의 ‘이프 아이 에버 필 베터’(If I ever feel better)였다. 익숙한 전주가 울려 퍼질 때, 기억 저편에 있던 스노 글로브가 내 앞으로 도르르 굴러왔다. 거기엔 무언가 되고 싶지만 정확히 무엇이 될지 몰랐던 그 시절의 내가 지하철 한구석에 기대어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시월의 선선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공기가 후끈했다. 노래를 따라 부르는 어떤 사람은 그만의 스노 글로브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고, 피닉스의 음악을 처음 듣는 것 같은 솜털이 보송한 누군가는 이 순간을 자신만의 스노 글로브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이들과 함께 뛰고 있는 오늘의 나를 스노 글로브 너머로 보게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에스엔에스(SNS)에서 올해 열릴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의 출연진 정보를 읽었다. 부산으로 돌아온 첫해, 출근길을 함께 했던 품 비푸릿의 이름이 있었다. 시월에 그가 무대에서 ‘롱 곤’(Long gone)를 부른다면, 어김없이 작은 스노 글로브가 내 손 위로 굴러올 것이다. 거기엔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예상치 못한 외로움과 좌절감에 방황하던 그때의 내가 있을 것이다.



노래를 함께 듣는 이들의 스노 글로브가 저마다 반짝이며 돌아갈 동안, 가을 하늘은 맑고 가수의 목소리는 어김없이 아름다울 것이다. 아마 그땐 옆에 선 친구에게 문득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있잖아, 이거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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