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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특파원 리포트] 정치인의 말, 정당의 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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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2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마지막 날 천장에서 풍선 10만개가 쏟아지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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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시카고에서 치러진 민주당 전당대회에는 나흘 동안 200여 명의 연사가 등장했다. 전현직 대통령부터 차차기를 노리는 장관과 주지사, 유명 배우, 총기 사건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 10대 때 낙태를 경험한 여성 등 각계를 망라한 이 무대는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물론 재선 도전을 포기하고 횃불을 넘긴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는 격려의 박수가, 카멀라 해리스보다 8년 앞서 첫 여성 대통령에 도전했지만 지금은 원로로 남게 된 힐러리 클린턴에게는 미안함의 박수가 쏟아졌다. 하지만 대다수는 짧으면 3분, 길면 30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오로지 말 하나로 승부를 봐야 했다. 의미는 기본이고 재미가 있어야 했고, 재치 있는 ‘펀치 라인’ 몇 개 정도는 있어야 2만 인파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었다.

미국 정치인들의 필설(筆舌)에 감탄한 경우가 적지 않다. 현역 중 아무나 콕 집어도 그는 학창 시절 ‘토론의 신’이란 얘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전 교육 과정에 거쳐 말하기·글쓰기를 강조한다. 고등교육으로 갈수록 수사학의 중요성이 커지는데 이는 말을 하고 글을 써서 타인의 마음을 얻는 게 모든 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정치야말로 말과 글이 전부 아닌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본인의 16년 전 선거 슬로건을 패러디한 “예스 쉬 캔”이란 말로 그날 밤 모든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팀 월즈 부통령 후보는 시험관 시술로 7년 만에 얻은 딸, 학습 장애를 앓은 아들을 호명하며 “내 세상의 전부”라고 말해 보는 이들을 뜨겁게 만들었다. 풋볼 코치였던 그가 “하루에 1야드씩 전진하자”고 말한 건 삼척동자의 마음도 움직이게 할 메타포였다.

2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최고(最古) 정당의 자부심과 저력이 대회 곳곳에 녹아있는 모습도 돋보였다. 1만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공항 입국장부터 시내 곳곳에 배치돼 먼저 참가자들에게 다가갔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자원봉사를 오겠다는 대기자만 1만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70대 여성 봉사자는 “1968년 시카고 대회 때 엄마 손을 잡고 전대장에 왔던 것을 기억한다”며 “여성·흑인 후보를 추대하는 역사적 순간에 뭐라도 할 수 있어 영광”이라고 했다. 전국에서 모인 대의원들은 아침 일찍부터 모여 대선 필승 전략을 논의했고, 한편에선 당 간부들이 나와 선거 자금 관리부터 소셜미디어 활용법까지 교육했다.

전당대회는 마지막 날 해리스의 후보 수락 연설과 함께 천장에서 성조기를 상징하는 파란색·빨간색·하얀색 풍선 10만개가 내려오며 막을 내렸다. ‘대선의 꽃’이라 불리는 나흘 행사를 지켜본 이들이 느낀 바는 각자가 달랐을 것이다. 저급할 대로 저급해진 여의도의 언어 문화 속 바른 필설이 되는 정치인, 지지자든 아니든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이벤트를 기획하는 정치 결사체가 우리도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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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김은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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