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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러시아와 서방 갈등에 기름 부은 ‘텔레그램 창업자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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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분쟁 번진 텔레그램 CEO 두로프 체포

조선일보

텔레그램 창립자 파벨 두로프(40). 소셜미디어 인스타그램에 본인이 직접 올린 사진이다.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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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검찰에 체포된 텔레그램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파벨 두로프(40) 사건이 그의 모국 러시아와 서방 국가들 간의 국제적 분쟁으로 비화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의 배후에 유럽연합(EU)과 미국 등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번 사건을 러시아를 핍박하려는 서방의 공작으로 몰고 가고 있다. 반면 서방은 이를 일축하면서도 두로프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간의 밀월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

온라인 메신저·소셜미디어인 텔레그램은 강력한 보안성을 내세워 세계적으로 9억명 넘는 이용자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일반인은 물론 정부 기관과 군에서도 폭넓게 사용하는 ‘범(汎)국민 메신저’로 자리 잡았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두로프 체포 후 국가 차원에서 강력 반발하고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러시아 대통령실) 대변인은 27일 브리핑에서 “프랑스가 두로프에게 적용한 혐의들은 매우 심각한 내용”이라며 “프랑스는 이에 걸맞은 제대로 된 증거를 내놔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검찰은 두로프에게 마약과 아동 음란물 거래 방조, 조직범죄 수익금 세탁, 불법적 암호화 서비스 제공 등 혐의 총 12개를 적용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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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양인성


페스코프는 “만약 프랑스가 증거 제시에 실패한다면, 두로프의 체포는 통신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직접적 시도이자 (러시아에 대한) 협박으로 간주될 것”이라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부인했던, 바로 그 유형(정치적 동기)의 결정이 될 것이다”라고도 했다. “프랑스 사법부의 독립적 결정으로, 어떤 정치적 동기도 없다”는 마크롱의 전날 발언을 겨냥한 것이다. 페스코프의 발언은 푸틴 대통령이 이번 사태를 서방의 ‘반(反)러시아 도발’로 보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되고 있다. 이에 발맞춘 듯 ‘미국 배후론’도 제기됐다. 뱌체슬라프 볼로딘 하원 의장은 “텔레그램은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유일한 대형 인터넷 서비스(플랫폼)”라며 “대선을 앞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텔레그램을 장악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러시아가 오랫동안 소셜미디어를 통한 치밀한 여론 조작으로 자국 대통령 선거에 개입해 왔다고 의심해 왔다. 미 국가정보국(DNI)은 지난달 29일 대선 100일을 앞두고 발표한 ‘선거 보안 정보’에서 “러시아·중국·이란이 대선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소셜미디어 등으로 공작을 벌여왔다”며 이 중 최대 위협으로 러시아를 꼽았다. DNI는 특히 “러시아가 특정 후보를 지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고도 밝혔다. 실명은 거론하지 않았으나 ‘특정 후보’가 푸틴과 친분을 과시해 온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바이든 행정부가 이에 대한 대응으로 우방 프랑스를 사주해 두로프를 붙잡았다는 것이 러시아의 시각인 셈이다.

푸틴의 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도 이날 “두로프 체포 사건이 (러시아를 겨냥한) 정치적 동기에 의한 것임은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치적 동기가 없다는) 프랑스의 주장이 맞다면 페이스북 등을 운영하는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도 체포해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 페이스북에서 텔레그램 못지않은 각종 불법 행위와 가짜 정보 확산이 벌어지고 있다는 논리다.

텔레그램을 둘러싼 대립은 EU로도 확대됐다. EU 집행위원회는 27일 “두로프 체포는 프랑스 당국이 국내 형법에 따라 집행한 것”이라며 “EU의 디지털서비스법(DSA)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공식 입장을 냈다. DSA는 온라인 플랫폼상의 개인 정보 유출과 유해 콘텐츠 유통, 사이버 범죄를 규제하는 법률이다. 앞서 텔레그램 측은 지난 26일 두로프 체포에 반발하는 성명을 내며 “우리는 DSA를 포함한 EU 법을 철저히 준수해 왔다”고 했다. 이번 사태에 EU가 관련된 듯한 뉘앙스를 풍기자, EU가 선제적으로 선을 그었다.

EU는 향후 텔레그램에 대한 DSA 적용이 확대·강화될 수 있음도 시사했다. 텔레그램의 EU 내 월간 활성이용자 수가 ‘초대형 온라인 플랫폼(VLOP)’ 기준인 4500만명 이상이 아닌지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VLOP에는 가짜·유해 콘텐츠 확산 방지를 위한 더 강력한 의무가 부과된다. 텔레그램은 최근까지 EU 내 이용자 수를 4100만명으로 신고해 왔다. EU의 입장은 ‘텔레그램이 규제를 피하려고 이용자 수를 일부러 낮춰 거짓 신고했는지 철저하게 살피겠다’는 압박으로 풀이된다. 텔레그램이 이용자 수를 속였다는 결론이 나올 경우 EU는 추가 조사와 각종 제재 조치에 나설 수 있고, 러시아와 추가적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푸틴 정권이 두로프를 적극 두둔하고 나서자 양측의 관계에 대한 서방의 의혹의 눈길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푸틴에게 두로프는 한때 반드시 손봐야 할 골칫거리(thorn in the side)였지만, 이제는 ‘서방의 손아귀에서 빼내야 하는 VIP’로 변신했다”고 평했다. 텔레그램은 러시아 내 반정부 인사와 분리주의 테러리스트, 범죄자들의 은밀한 통신 수단으로 쓰이면서 2018년엔 러시아 내 접속 차단 조치까지 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러시아의 반서방·반미 선전 도구로 유용하게 활용되면서 푸틴과 러시아 정부의 보호를 받는 입장이 됐다는 게 NYT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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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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