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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만물상] 74년 만에 美 해군에 보은하는 ‘K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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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양진경


1950년 12월 흥남 부두에서 피란민 수만 명의 목숨을 구한 미 해군 수송함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미국 ‘조선왕’ 헨리 카이저가 2차 세계대전 때 3800척이나 만든 리버티 수송함 중 한 척이었다. 후버댐 건설에도 참여한 건설 업자 카이저는 선박 건조법을 혁신해 한 척당 건조 시간을 355일에서 17일로 단축했다. 기록 경신을 위한 시험 제작에선 4일 15시간 만에 리버티 한 척을 완성하기도 했다.

▶카이저의 혁신은 크게 두 가지였다. 배를 만들 때 용골부터 세우고 나무, 철판을 붙이던 방식을 버리고, 선박 부품이 들어간 블록을 공장에서 먼저 만든 다음, 조선소로 가져와 최종 조립했다. 또 하나는 리벳(버섯 모양 못)으로 철판을 붙이지 않고, 용접으로 철판을 붙이는 방법을 채택했다. 그의 조선소가 배를 워낙 빨리 만들어 내자, 카이저에게 ‘론치얼랏(Launch a lot·대량 진수) 경(卿)’이란 별명이 붙었다.

▶조선 강국 미국이 1920년에 제정된 존스법(Jones Act)으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이 법은 미국에서 만든 선박만이 미국 항구에서 다른 항구로 물품을 운송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미국 조선사에게 자국 선박 독점권을 준 것이다. 경쟁력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 조선소들이 1960년대부터 미국 조선사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에선 사실상 항공모함, 구축함, 잠수함 등 군함 건조만 이뤄지고 있지만 생산성은 한심하다.

▶미국 조선업 몰락은 세계 안보 지형에 격변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의 세계 패권을 지탱하는 미 해군이 몇 수 아래로 보았던 중국 해군에 밀릴 위기다. 중국의 선박 건조 능력은 세계 1위다. 항공모함 수는 11대3으로 미국이 여전히 우위에 있지만 전투함 숫자는 370척 대 280척으로 중국에 역전됐다. 미국 싱크탱크가 “한국·일본 조선사에 빨리 SOS를 쳐야 한다”고 조언하고, 상원의원들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대책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지난 2월 미 해군성 장관이 한국 조선소를 방문, “원더풀”을 연발하고 돌아가더니, 엊그제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한화오션이 미 해군 함정 정비 1호 계약을 따낸 것이다. 앞으로 한국 조선소 도크에서 미 항공모함을 보게 될 날이 올 수도 있다. 미 해군 함정 MRO(유지·보수) 사업 규모는 연간 20조원에 이른다. 실적이 쌓이면 미 해군이 군함 건조를 맡길 날이 올지도 모른다. 미 군함에 피란민 운송 신세를 졌던 한국이 74년 만에 미국이 해군력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지원국으로 거듭났다.

[김홍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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