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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 (일)

글 한 줄 없는 책이 그림으로 쏟아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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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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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빠지는 경향이 있어서 만화나 그림책을 볼 때 그림을 건성 보기 일쑤다. 그래서 그림을 참을 수 없어 책을 들추기 어려워하는 독자들처럼 그림에 까다롭게 굴지는 않는다. 그래도 좋은 그림에 감동은 할 줄은 알아서 그림 때문에 페이지마다 한참을 머무는 일도 생긴다. 잘생긴 주인공이 영화에 몰입을 방해하기도 하는 것처럼 그림이 이야기를 방해하는 일도 생긴다. 이상적인 상황은 그림과 이야기가 찰떡같이 맞아떨어지는 것일 텐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스스로가 가진 멋진 이야기를 스스로 그려야 작가로 대접받던 시대가 지나, 이젠 이야기와 그림 작가를 달리 두고 작업하는 경우도 많다. 앞으로는 같은 이야기에 다른 그림을 입은 만화들도 나오지 싶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림이 말풍선의 이야기에 어울리는 장식인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말풍선 하나 달리지 않은, 글자 없이 그림만으로 웅장한 이야기를 전하는 책들도 많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가끔 들르는 실감 영상관에서 옛 그림에 파묻히는 것과 비슷할까? 남북이 갈려 쉽게 갈 수 없는 금강산 그림을 겸재 정선이 많이 그렸다. 박물관에서는 정선이 1711년 신묘년에 그린 풍악도첩을 폭 60미터, 높이 5미터의 파노라마 영상으로 재현해 놓았는데, 그 안에서 거닐면 금강산의 절경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곳의 정자는 사선정이다. 영랑, 술랑, 남랑, 언상이라는 신라의 화랑, 후대에 신선으로 불린 이들이 놀던 삼일포에 그들을 기려 만든 건물. 하루 놀러 와 삼일을 떠날 수 없는 압도적인 풍경 위에 놓여 있다.



겸재 정선의 제자 현재 심사정의 집안은 증조부가 인조반정의 일등 공신인 권세가였다. 하지만 조부가 과거 시험 부정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 돌아와서는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어난 시해 시도와 또 엮여 패가망신을 한다. 벼슬길이 난망해진 심사정은 겸재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스승의 영향이었는지 현재도 금강산을 많이 그렸고 그 그림으로 유명세를 탔다.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현재의 금강산도가 중국에서도 팔렸다고 했다. 서유구는 직접 가지 않고도 현재의 그림 때문에 방 안에 누워 금강산을 거닐 수 있다고 했다. 경치를 눈앞으로 끌어당겨 감동을 준다.



현재가 그린 삼일포는 간송 미술관에 남아 있다. 그림을 처음 만나면 삼일포 호수에 눈이 내리는 듯하다. 반전은 이 눈은 현재가 그려 넣은 것이 아니라 빗살수염벌레가 그린 것이란 사실. 작은 딱정벌레가 먹이 삼아 구멍을 뚫었다. 문화재를 복원할 때 보통은 이런 구멍들을 메꾸는데, 위치가 공교로워 복원할 때 구멍을 두고 종이를 덧대었다. 벌레가 그림 속 삼일포의 계절을 바꾸었다. ‘눈 내리는 삼일포’는 벌레가 만든 사건을 이야기로 발전시킨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현재가 그린 삼일포 풍경에 눈이 조금씩 더 쌓인다. 마지막엔 마침내 눈이 세상을 덮어 완전히 순백이 된 세상이 펼쳐진다. 눈이 쌓인 것일까? 벌레가 먹어치운 것일까? 시간이 지운 것일까? 글 한줄 없는 책이 그림으로 말을 한 무더기 쏟는다. 내 안에선 만화책과 그림책의 경계를 지웠다.



만화 애호가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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