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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 (일)

[외교비사⑧] 국내 밀수 조직에 휘둘린 '주한 외국 공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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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명의대여, 골프채·녹용 반입
세관 무사통과, 당시 수십억원 규모
사례금 받은 공관원, 본국 출국 조치


더팩트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90~1991년 주한 외국 대사관 공관원들이 당시 돈으로 수십억원에 상당한 밀수품 반입에 연루된 사건을 재구성했다. /임영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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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1990~1991년 주한 외국 대사관 공관원들이 국내 밀수 조직원 '랑'에게 포섭된 사건이 발생했다. 랑은 현금과 선물을 대가로 공관원들의 명의를 빌려 가구를 수입한 것으로 서류를 조작, 수십억 원 상당의 고가 골프채와 녹용을 반입했다. 결국 사법 당국에 덜미가 잡힌 그는 범죄 사실을 실토했다. 연루된 외국 대사관은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과테말라, 볼리비아 등 모두 4곳이었다.

랑은 1989년 9월 주한 콜롬비아 대사관 운전원으로 근무하며 무관으로 파견된 콜롬비아 대령 A와 접촉했다. 랑은 운전원 일을 그만두기 한 달여 전 A에게 다가가 "홍콩에서 가구를 수입해야 하는데 명의를 빌려줄 수 있겠느냐"고 요청했다. A는 랑이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면세 혜택을 받으려는 것으로 판단했다. A는 이를 거절하면서도 "주한 볼리비아 대사관 공사 B를 소개해주겠다"고 제안했다. B를 소개 받은 랑은 그의 명의를 통해 세관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고, 사례로 A에게 현금 250만 원을 쥐여줬다. A는 이를 B와 절반씩 나눠 가졌다.

주한 콜롬비아 대사관을 떠난 랑은 이듬해 4월 A에게 연락해 "300만 원을 줄 테니 명의를 한 번 더 빌려줄 수 없겠느냐"고 제안했다. A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고 세관 통과 역시 별 탈 없이 이뤄졌다. 문득 A는 랑에게 "왜 이렇게 많은 수고료를 나에게 주느냐"고 물었다. 이에 랑은 "수입된 가구들이 한국에서는 고가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A의 명의로 수입된 물품은 당시 돈으로 3억5000만 원에 상당한 골프채 225세트였다.

A가 랑의 정체를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A는 랑의 요청으로 인천에 함께 가게됐는데, 그곳에서 세관원들과 마주하게 됐다. 세관원들은 A에게 "본인 명의 물품이니 개봉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를 지켜보던 랑은 곧장 A에게 "개봉하면 안 된다고 말하라"고 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A는 랑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따져 물었고, 결국 물품이 수입 가구가 아닌 골프채 세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격분한 A는 세관원들에게 "이 물건들은 모두 랑의 것"이라고 항변했지만 랑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랑의 밀수는 앞서 A가 소개해 준 주한 볼리비아 대사관 공사 B를 통해서도 계속됐다. 랑은 B에게 가구 수입을 위한 명의대여를 요청했고, 물품이 무사히 세관을 통과하자 그 대가로 300만 원을 건넸다. 하지만 이 역시 가구가 아닌 골프채 85세트였다. 향후 수사 과정에서 골프채를 비롯해 녹용 500㎏이 국내에 반입된 것으로 확인됐는데, 이들 물품은 모두 12억 원에 상당한 규모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대량의 녹용은 운송 과정에서 파손된 화물을 통해 적발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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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베네수엘라 대사관 무관 C의 진술서. C는 애초 랑으로부터 어떠한 사례도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가 구두로 선물(현금)을 수령했다고 말을 바꿨다. 진술서에 적시된 '그리할바'는 A다. /외교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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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은 주한 베네수엘라 대사관 무관 C와도 접촉해 밀수품을 손쉽게 들여오기도 했다. 랑은 C를 앞선 B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A에게 소개받아 알게 됐다. C는 랑의 요청에 따라 관련 물품의 세관 통과를 도와줬고 그에 대한 대가로 현금을 받았다. 랑은 직접 외국 공관원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랑은 주한 과테말라 대사관 1등 서기관 D에게 "이사를 위해 수입 가구를 주문했는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이에 D는 우리 외교부로부터 관련된 허가 서류를 받아 랑에게 건넸다. 랑은 그 보답으로 D를 저녁 만찬에 초대해 줬고 선물도 전달했다.

이같은 사실이 사법 당국에 의해 발각되자 각국 대사관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랑에게 B와 C를 소개해 준 A 소속 주한 콜롬비아 대사관은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A를 출국시키겠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랑에 대한 국내 수사가 진행 중이고 콜롬비아가 한국 전쟁 참전국인 데다, 양국 간 우호 관계를 고려해 A에 대한 귀국 조치를 막지 않았다. 또한 당시 한국인 선장이 콜롬비아 국적 밀항자 2명을 해상 유기해 사망한 사건으로 양국 관계가 다소 경색된 점도 고려됐다.

B 소속 주한 볼리비아 대사관은 우리 측에 "물의를 일으킨 데 사과하고, 본국 외교부 장관이 B를 즉각 소환하겠다고 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C 소속 주한 베네수엘라 대사관 역시 "믿을 수 없으며 놀랍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건 D 소속 주한 과테말라 대사관이었다. 대사관 측은 "라틴아메리카 외교단의 모욕이다. 용납할 수 없고 본국에 보고해 D를 소환하도록 하겠다"며 "D가 속해 있던 무관부를 폐쇄하겠다"고 했다.

외교부는 각국 대사관에 엄중한 항의를 표명하고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냈다. 다만 관련자들의 본국 귀국 조치는 '관계'를 고려해 막지 않았다. 그러면서 해당 사안들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유의해달라며 비밀 유지를 당부했다. 1991년 11월 관세청에 대한 국회 자료 제출 요구에 따라 사건 일부가 보도되긴 했지만, 외교부가 구체적인 자료 제공을 거부하면서 이같은 내막은 공개되지 않았다.

js8814@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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