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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 (일)

“한국 어떻게 믿고 일하나”…국제 R&D 협력, 韓고무줄 예산에 포기 속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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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오 서울공대 학장·박아형 UCLA공대 학장 대담

공동연구 R&D 예산 늘었지만
다른 분야 줄인 ‘제로섬’ 불과

해외대학·기관 지불하는 비용
정부가 적정선 제시해줘야

본인인증제·한글지원서 등
낡은 시스템·관행도 개선 필요


매일경제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미과학자대회(UKC) 2024에서 김영오(오른쪽) 서울대 공대 학장과 박아형 로스엔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공대 학장이 만나 대담을 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 고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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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하고 국제협력 연구개발(R&D)을 하려면 너무 장애물이 많아요. 시스템에서 연구 지원을 신청하려고 하면 본인 인증부터 막힙니다. 연구 지원서도 한글만 써야 해요.”(박아형 미 UCLA 공대 학장)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미과학자대회(UKC) 2024에서 한국과 미국을 대표하는 대학의 공대 학장들이 R&D 국제협력안을 놓고 머리를 맞댔다. 김영오 서울대 공대 학장과 박아형 UCLA 새뮤얼리공대 학장이 만나 대담을 나눴다. 두 학장은 세계 1등 기술을 위해 국제협력이 필수라는데 생각을 같이 하면서도 한국 정부의 정책 추진 및 운영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박 학장은 먼저 국제협력 R&D의 활성화를 위해 본인인증제, 한국어 연구지원서와 같은 한국의 낡은 공동연구 제도·인프라부터 선진화되어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는 “미국 로스엔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교수들도 이런 점들 때문에 국제협력을 포기했다”며 “한국의 국제협력은 재미동포랑만 하는건가. 노벨상 받은 연구자들도 다 끌고와서 한국 과학기술 발전 이루자는 것 아니었나”고 꼬집었다.

최근 문제가 된 고무줄 R&D 예산도 국제 과학계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요소라고 지목했다. 박 학장은 “다른 분야 R&D 예산을 삭감해 국제협력 예산을 채우는 ‘제로섬(zero-sum)’ 게임은 안된다”고 지적했다. 제로섬 게임은 한쪽의 이득과 다른 쪽의 손실을 더하면 제로가 되는 상태를 뜻한다.

신뢰가 중요한 국제협력에서 제로섬 게임을 기반으로 한, 한순간에 좌지우지되는 예산 운용은 과학계 커뮤니티에 믿음을 줄 수 없다는 의미다. 박 학장은 “한국과 국제협력을 하자고, 돈을 매칭하자고 미국을 설득할 때 할 말이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 정부는 타 분야 R&D 예산을 삭감해 국제협력 예산을 늘렸다. 올해 R&D 예산이 2023년 대비 5조2000억원 감축된 가운데, 올해 글로벌 R&D 예산은 전년도 약 5000억원에서 약 1조8000억원으로 늘렸다.

내년도 예산 역시 약 2조2000억원을 배정했다. 내년 11월 국내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아시아·태평양 역내 국가의 과학자 교류를 지원하는 사업, 우리 연구개발특구와 미국 국립과학재단(NSF) 등과의 연계·협력을 통해 연구자와 기술기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글로벌 부스트업 프로젝트 등을 신규로 추진한다.

이렇게 급격하게 예산이 늘고 여러 신규사업들이 추진되고 있지만 정부의 준비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연구현장에서 제기된다. 김 학장은 “정부가 국제협력을 원하고 돈을 투자는 하는데, 아직 관련한 인프라스트럭처가 제대로 마련이 안되어 있다”고 진단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주요 국제협력사업으로 추진 중인 ‘보스턴 코리아 프로젝트’는 ‘오버헤드(간접비)’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다. 간접비는 연구자가 따온 연구비 중 기관이 징수하는 비용이다. 기관이 임대료나 전기 요금, 관리비 등의 명목으로 사용한다.

한국 연구자들은 미국 하버드대나 존스홉킨스대 등 여러 명문대들과 국제협력을 추진하려고 하지만 각 대학별로 상이하고 평균적으로 높은 간접비 기준이 공동연구 협약체결을 막고 있다.

박 학장은 “펀딩 에이전시(돈을 주는 기관)인 한국 정부가 먼저 나서 간접비 비율 가이드라인을 정해주면 끝나는 일”이라며 “미국 내 펀딩 에이전시들도 여러 기관들과 그렇게 일해왔다. 한국이 몰라서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한국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 김 학장이나 박 학장처럼 리더쉽 레벨에 있는 인사들이 국제협력을 추진하기도 용이하다. 이를 근거로 국제협력이 이뤄질 수 있도록 각자 학교를 설득하는 일에 나서는데도 근거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이 밖에 미비한 국제화 연구 시스템·국제협력 추진분야 평가기준 등 문제도 제기했다. 두 학장은 이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국제협력도 힘들 것이라 전망했다.

두 사람은 “한국이 국제협력을 하려는 해외 기관들은 돈이 많은 곳들”이라며 “20억~30억원은 그들 입장에서 많은 돈은 아니다. 장애물들을 걷어내지 않는다면 국제협력은 어렵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다만 해외 연구자들 입장에서 한국 연구자들은 매력적인 협력 파트너라는 점에선 의견이 일치했다. 이미 실력으로는 인정받은 연구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박 학장은 “UCLA 총장도 늘 한국을 무시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며 “연구자들은 한국과 굉장히 협력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두 학장은 지금이 국제협력을 추진하기에 적기라고도 설명했다. 한인 여성 최초로 미국 메이저 공대 학장에 선임된 박 학장처럼 리더십 레벨에 이른 해외 한인 과학기술인들도 점점 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공대 여성 교수들이 증가하는 등 다양성이 풍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공대와 UCLA 공대는 탄소중립 등의 분야에서 국제협력을 추진할 예정이다. 김 학장은 “국제협력을 통해 한국과 미국이 ‘윈윈’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공대 간 국제협력은 빠른 혁신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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