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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 (월)

한가위 앞 가족의 환상을 깨 가족을 구하리라[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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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아르헨티나 소설가 사만타 슈웨블린은 자신을 “주로 단편 소설가”로 소개한다. 그의 세 번째 단편집 ‘일곱채의 빈집’(Seven Empty Houses)이 국내 출간됐다. 사진은 장편 ‘피버 드림’을 들고 첫 방한한 2022년 출판사 창비와 인터뷰하는 모습. 창비TV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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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곱채의 빈집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엄지영 옮김 l 창비 l 1만5000원



곧 한가위다. 가족의 시간. 가족의 개념은 바뀔망정 그 시간의 당위는 여전해 보인다. 장편 ‘피버 드림’(Fever Dream) 등으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후보(2017년 최종, 2019·20년 예선)에만 세 차례 올랐던 아르헨티나 소설가 사만타 슈웨블린(46)의 작품들로 ‘가족의 시간’을 역발상해본다.



“가족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환경”이란 작가 말대로, ‘가족’은 그의 여러 작품을 구성하는 인물이자 사건, 배경이다. 다만, 공포와 상실로 서늘할 뿐이다. 이 한랭 기단은 가족에게 닥쳐오는 동시에 가족에게서 발생되는 것이다.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서스펜스와 남미 환상소설의 문법은 따라서 슈웨블린에게 필연이겠다.



“문학에서는 말해지지 않는 것이 때로는 이야기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고 작가는 표명해 왔는데, 무릇 가족에서야말로 ‘말해지지 않는 것’이 진실이고 진심이지 않은가.



이달 국내 출간된 슈웨블린 작품은 단편집 ‘일곱채의 빈집’(2015)이다. ‘집’이 가족의 거처, 기억의 공간을 말함은 물론이다. 그 가운데 중편에 가까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숨소리’가 놀랍다.



롤라는 노년의 여성이다. “자신이 지나치게 오래 산 데다, 삶이 너무 단순하고 하찮아서 이제 사라질 수 있을 만큼의 무게조차 없다”며 절망 중이다. 이젠 5분도 서 있기 어렵다. 걷자면 “어떤 조상이 자기 목에서 숨을 쉬는” 듯 호흡이 가쁘다. 그 숨소리를 감추려 부러 휘파람 소리를 낸다. 57년을 함께 산 남편이 장을 보고 식사를 차린다. 롤라가 설거지를 돕긴 한다. 가끔 음식도 한다. 남편은 롤라가 그러도록 눈치껏 둘 뿐이다. 자식 하나를, 부부는, 오래전 잃었다. 소설은 다 들추지 않는다. 아들은 아팠고, 롤라가 피범벅인 채 집 안에서 시현된 모자(母子)의 마지막 장면이 참혹했다는 것만이 스냅 사진 몇 컷과도 같은 문장으로 유추된다. ‘말해지지 않는 것’이다. 남편 혼자 장을 보게 되기 전까지, 함께 슈퍼에 갔다가 롤라가 치른 “지옥 같은 사고”도 다 말해지지 않긴 마찬가지다.



집 안 가득한 ‘상자’의 함의가 예사롭지 않다. 어떤 상자나 상황은 롤라를 초조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화나게도 한다. 과거 아들이 먹던 핫초코 분말을 왜 남편은 상자째 사두는가. 그건 그렇다 치자. 어느 날은 핫초코 상자가 사라진다, 다시 보이더니 줄어 있다, 어느새 새 상자로 바뀐다. 왜지, 누구도 먹지 않는데? 남편은 줄곧 슈퍼마켓 이야기를 전한다. 왜일까? 롤라는 예의 끔찍한 기억 때문에 듣기 싫다.



공교롭게 옆집으로 소년과 40대 엄마가 이사 오면서 노부부 사이의 긴장도 침묵도 더 날카로워진다. 남편이 소년과 말을 트더니, 이젠 뒷마당을 갈 때마다 아이가 달려온다. 마당 텃밭에서 일하는 동안은 아예 울타리를 넘어온다, 함께 웃는다. 핫초코는 소년에게 먹인 건가. 롤라는 동네가 더 위험해졌다 느끼던 차다. 늦은 밤 집 밖에서 소란을 피우는 그 소년 무리. 즈음 슈퍼마켓 강도 사건도 일어난다. 실제(?) 옆집 소년이 남편 없는 사이 집 창고까지 침입한다. 집 안팎의 시종 불온함은 예보였을까. 며칠 뒤 롤라는 남편의 급작스런 죽음을 맞고, 소년의 죽음을 듣게 된다. ‘죽음’이야말로 제 것이길 그리 바라왔는데 말이다.



소설은 실재와 환시, 환청이 뒤섞인다. 가족과 집에 대한 환상만 없다. 메타포가 매우 중층적이나 몇 가지 먼저 부각된다. 아이를 상실한 가족의 끝나지 않은 수형 상태란 점이 첫째다. 망각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기억이란 게 있는가. 롤라는 집요하게 물건을 정리해 상자에 담아대지만, 실상 어떤 상자에 무엇이 담겼는지 잊는다. 기억과 망각의 긴장이 환각이고, 그 생애주기의 욕망과 체념의 모순이 롤라의 강박일 것이다. 기억은 망각되면서 거듭 죽음을 재생하고 비로소 완성시킨다. 평론가 김현의 말대로다. “사람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육체적으로, 또 한 번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짐으로 정신적으로 죽는다.” 모두를 잃은 롤라는 과연 죽을 수 있는가.



치매나 신경쇠약, (아마도) 조울 따위 병후로만 설명될 수 없는, 롤라의 ‘폐쇄’된 뇌 회로를 따라 비춰지는 막판의 사태를 보자. “돈은 여기에”라는 쪽지가 서랍에 붙어 있고, 개폐 방향이 수도꼭지에 표기되어 있으며, 남편의 이름이 적힌 상자, 아들의 이름이 붙은 상자, “열지 마시오”라고 적힌 상자, 급기야 “내 이름은 롤라, 여기는 내 집이다” 쓰인 손글씨 쪽지까지 집 안 가득 “황폐”하다. 모두를 기억하려던 집의 현실이다.



고급주택에 침입해 일부러 가구 배치를 헝클어 놓는 모녀(‘그런 게 아니라니까’), 동생이 의도대로 가족의 관심을 독차지한 가운데 한 성인 남자에 자타의로 이끌려 간 장녀(‘운 없는 남자’)의 이야기 등 소설집엔 가족과 집을 해체하거나 의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자욱하다. 이는 앞선 소설집 ‘입속의 새’(2009)와도 맥이 닿는다. 사춘기 여자아이의 불안과 부모의 고민을 잔혹극으로 풀어낸 표제작, 임신한 여성의 갈등 불안을 판타지로 그린 ‘보존’ 등에서 두드러진다. 가족의 내재적 위기가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숨소리’라면, 사회의 위기가 가족을 겁박한 양태가 장편 ‘피버 드림’이다.



작가의 의도를 가족과 집에 대한 부정으로 볼 까닭은 없다. 되레 환상을 깨부숴 현실을 구한달까. 롤라는 고난과 슬픔만 남은 공간에서, 홀로 죽음을 맞으며, 비로소 원소처럼 남은 가족과의 기억 몇 편을 떠올린다. 그것엔 소리가 없다. “그녀는 죽지 않을 것이다. (…) 하지만 심연은 이미 열려 있었고, 말과 사물은 이제 빛과 더불어 전속력으로 그녀의 몸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일곱채의 빈집’은 2022년 전미도서상(번역 부문)을 받았다. 슈웨블린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랑, 가족, 돈 등 우리가 만들어 놓은, 과도하게 구조화된 상자 안에 계속 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일종의 공개 질문”이라고 작품을 소개했다. 이해가 어려운 단편이 없진 않다. 하지만 ‘피버 드림’을 “아이를 잃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과연 그걸 극복할 수 있을까? 모든 일이 순조롭더라도 모든 형태의 사랑은 고통스러운가. 그렇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간명한 질문이 선행했듯, 이번 소설집은 ‘가족이 황폐해지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극복할 수 있을까’로 안내될 만하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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