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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 (월)

[기자수첩] ‘남의 불안’으로 먹고사는 제1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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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여의도에서 먹히는 ‘남는 장사’가 몇 개 있다. 단식농성, 장외투쟁 같은 건 일단 시작 만으로도 지지층을 모은다. ‘오죽하면…’ 정서가 밑바닥 여론을 흔든다. 접을 땐 상대 실정(失政)에 맞춰 적당한 명분을 만들면 된다. 일종의 무패 전략이다.

단, 과반 의석을 차지한 거대 정당이 쓰기엔 면이 안 선다. 이럴 때 방법이 있다. 군중의 불안을 자극하면 된다. 실체는 필요 없다. 증거는 나중으로 미뤄도 된다. 모호할 수록 좋다. 불안은 전염되고, 증오는 공유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최근 여야 대표회담에서 “정부가 계엄령을 준비한다더라”고 했다. 여야 대표가 무려 11년만에 만난 공개 회담의 모두발언이었다. 이 대표는 “계엄 이야기가 자꾸 나온다” “국회의원 체포·구금 계획을 꾸몄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했다. 제1야당 대표가 저잣거리식 괴담을 국회로 들인 순간이었다.

반응은 신속했다. 대통령실은 곧바로 요동했다. 대변인이 “무책임한 선동이자 날조된 괴담” “당대표직을 걸고 말하라”는 입장을 냈다. 이튿날 여당 지도부 회의도 계엄으로 점철됐다. 당대표부터 원내대표, 최고위원 전원이 “거짓말하지 말라”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가짜뉴스 선동”이라고 했다.

4선 중진 김민석 최고위원은 이득을 톡톡히 봤다. 그는 지난달 말 ‘이재명 2기 지도부’ 출범 직후 공개회의에서 ‘국지전과 북풍 조성을 염두에 둔 계엄령 준비 작전’ 제보를 받았다고 했다. 데뷔 무대서 선보인 이 작품을 당대표가 그대로 받았다. 사석에서 만난 수도권 중진 의원은 “자기장사 제대로 한 것”이라고 했다.

근거를 묻자 김 최고위원은 “차차 제시하겠다”고 했다. 의원들에겐 증거가 있을까. 국회 국방위원장 출신 5선 안규백 의원은 라디오에서 “저한테 제보를 한 사람도, 제보를 들은 바도 없다”고 했다. 전직 원내수석인 박주민 의원은 “제가 제보 받은 건 없다”며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은 ‘이야기는 들린다’고 하더라”고 했다.

변명이 궁색해지자 당은 돌연 방향을 틀었다. 가능할 만하니 위험 신호 차원에서 ‘예방주사’를 놨다고 했다. 이들이 제시한 정황은 ▲김용현 국방장관 후보자 등 대통령 동문인 ‘충암고 출신’이 군 요직에 임명됐고 ▲박근혜 정부 때 계엄 문서 작성 사례가 있으며 ▲대통령이 ‘반국가세력’을 자주 언급한 점이다. ‘만에 하나’ 단서가 붙은 계엄 장사에 당 전체가 동원됐다.

최근 주식투자카페를 중심으로 퍼진 소문이 있다. 민주당이 ‘초부자 사모펀드 세력’과 결탁해 금융투자소득세 시행을 고집한다는 괴담이다. 금투세가 시행되면 사모펀드 최고세율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다는 게 이유다. 증거가 없어 국회 밖 낭설에 머물러 있다. 국민의힘이 이 음모론을 국회에서 다루면 민주당은 뭐라 할 건가. 일단 던지고 증거는 “차차 제시하면” 된다. 예방주사를 놔주는 일일 테니 말이다.

이슬기 기자(wisdom@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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