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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 (화)

살아선 노역, 죽어선 카데바… 37년 만에 드러난 부랑인 인권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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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 ‘형제복지원 판박이’ 수용시설 4곳 실태 규명

서울시립갱생원·충남천성원…

정부 정책으로 운영됐던 시설

감금·구타 등 37년 만에 드러나

시설 간 수용자 ‘회전문 입소’도

당시 수용 13명 피해사실 인정

1973년 가을 이영철(가명·66)씨는 대구역 대합실에서 시청 직원에게 단속돼 대구시립희망원에 강제수용됐다. 시멘트 바닥에서 자고 꽁보리밥을 먹어야 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갖가지 이유로 맞았다고 한다. 시설 5곳에서 입·퇴소를 반복하며 23년간 시설에 갇혀 지낸 이씨는 “공사를 하다 흙이 무너져 사람들이 매장당해 죽는 일도 있었다”며 “시설에서 죽은 사람을 100명 정도는 본 것 같은데 원장은 꼼짝도 안 했다”고 돌아봤다.

세계일보

9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열린 성인부랑인수용시설 사건 진실규명 결정 기자간담회에서 피해자 이영철(가명)씨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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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경기, 충남, 대구의 부랑인수용시설에서 자행된 감금·폭행·강제노역 등 대규모 인권침해 실상이 37년 만에 드러났다. 1987년 불거진 부산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이후에도 제대로 된 조사조차 받지 않았던 전국의 수용시설 내 인권침해 실상이 종합적으로 규명됐다.

제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6일 제86차 위원회에서 이런 내용의 ‘서울시립갱생원 등 성인부랑인수용시설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피해사실 인정)했다고 9일 밝혔다.

△서울시립갱생원 △대구시립희망원 △충남 천성원(대전 성지원·연기군 양지원) △경기 성혜원에서 주로 1970∼1980년대 인권침해를 당한 윤모씨 등 신청인 13명에 대해 피해 사실을 인정했다. 13명 중 10명은 형제복지원에서 강제 전원 되거나 형제복지원 퇴소 후 재수용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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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시설은 부랑인 단속과 강제수용 근거가 됐던 ‘내무부훈령’(1975년)과 ‘구걸행위자보호대책’(1981년), ‘부랑인선도시설 운영규정’(1987년) 등 부산형제복지원과 같은 정부 정책에 따라 운영된 성인부랑자수용시설이다. 겉으로는 복지정책을 내세웠지만 도시 빈민에 대한 우생학적 논리를 적용해 집단수용시설에 격리하고 인권을 유린한 실태가 또다시 확인된 것이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수용자들은 경찰·공무원 등의 불법 단속으로 연행된 뒤 지방자치단체나 민간법인이 위탁 운영한 부랑인 수용시설에 강제 입소됐다. 이들은 돈도 받지 않고 쉬는 날 없이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지자체는 이들을 유휴 노동력으로 봤고 서울시립갱생원 수용자들은 도시건설사업에도 강제동원됐다.

부랑인수용시설에서 빈번하게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 ‘회전문 입소’ 실태도 처음으로 확인됐다. 수용자들을 다른 시설 증축 공사에 투입하거나 인원 충원·규칙 위반자 처벌 등을 위해 시설끼리 강제 전원하는 방식이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수용 기간을 장기화해 평생에 걸쳐 시설 수용의 삶을 살게끔 하는 게 회전문 입소의 출발점이라고 봤다”고 말했다.

구타와 과도한 얼차려 등 가혹 행위가 만연했고 폭행으로 인한 사망사건도 다수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시설에서 사망한 수용자 주검을 해부실습용으로 교부한 사실도 확인됐다. 천성원 산하 성지원이 1982∼1992년 충남의 한 의대에 넘긴 해부용 주검은 117구에 달한다. 같은 기간 이 의대가 인수한 전체 주검 161구의 72.7%에 이른다. 다만 돈을 받고 시신을 팔아넘긴 매매 행위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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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이 9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열린 성인부랑인수용시설 사건 진실규명 결정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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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요양 시설을 추가로 만들어 처벌 목적의 근신 장소로 쓰인 정황도 파악됐다. 양지원의 경우 1987년 1월 지은 정신요양시설로 수용자 100여명을 보냈는데 상당수는 과거 정신과 치료 이력이 확인되지 않았다. 한 수용자 진단서엔 “정신상태가 완전히 썩었으며 개인주의에 물든 사람”이라고 적혔다. 임신 상태로 입소한 여성 수용자에게 친권 포기를 강요해 신생아를 입양 알선기관에 보낸 사례들도 있었다.

진실규명 대상자보다 실제 피해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형제복지원의 경우 피해자들이 직접 농성을 벌이고 권리구제 운동을 통해 사건이 널리 알려졌다. 이번 시설 4곳은 인권침해 실상이 잘 알려지지 않아 신청인이 적었다고 한다. 수용인원은 서울시립갱생원이 약 1900명, 대구시립희망원 1400명, 충남 천성원 1200명, 경기 성혜원은 520명으로 추정된다. 가장 큰 규모였던 형제복지원엔 3100명이 수용됐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이번 위원회 결정을 통해 더 많은 피해자가 결집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부산형제복지원은 1987년 폭행치사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검찰 수사를 받았지만 이들 시설 4곳은 아무런 조사를 받지 않았다.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이 성지원을 대상으로 현장 조사를 벌이려고 했으나 시설 측이 조사하러 온 국회의원과 기자들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무산됐다.

진실화해위는 유엔고문방지위원회 권고에 따라 피해자가 개별 소송 없이도 보상을 받을 수 있게 집단수용시설 피해 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 실질적인 구제 조치를 권고했다. 피해자에 대한 공식 사과와 트라우마 치료, 실태조사 등도 국가에 권고했다.

이정한 기자 ha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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